제사장교향곡 서곡, 이방인이 보고 있습니다(벧전 2.11-12).

20200704(묵상)

  

 

 

제사장교향곡 서곡, 이방인이 보고 있습니다.

1 Pet. 2.11-12

  

   본문 관찰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b)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12a)

 

 

듀엣(duet) - 너희와 이방인

 

   [제사장교향곡]

   서 곡 - 듀 엣(duet, 2.11-12)

   제1악장 - 국 가(2.13-17)

   제2악장 - 직 장(2.18-25)

   제3악장 - 가 정(3.1-7)

   제4악장 - ‘마지막으로’(3.8-12)

 

흩어진 나그네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1.1-12 2.4-10).

이제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착륙을 해야 할 때다. 거룩과 사랑과 성숙을 통해서(1.13-2.3)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과 사명을 따라(2.4-10) 그것이 실현되어야 할 삶의 무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벌써 이방인 중에서 비방하는 자들로 보고”(12)라는, 사면이 유리관인 채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하신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1.3b) 하셨는지를 이미 알고, 믿고, 확신하게 된 이상 그것만큼 성도의 무대는 세상이다.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이방인들로 더불어(11-12), 국가생활에서(2.13-17), 직장생활에서(2.18-25), 가정생활에서(3.1-7) 어떻게 하나님의 제사장적인 소명을 성취하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마침내 진리가 삶의 무대로 성육신하기 시작한다(1.1-2.10 2.11-12). 제사장은 이름(title)이 아니라 삶이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미 거듭났고(1.1-12), 그리하여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2.4-10) 여전히 영혼육체가 싸우고 있다는 베드로의 통찰은 매우 적절하다. 육체의 정욕은 항상 영혼을 대적하여 싸움을 걸어온다. ‘싸우는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왕같은 제사장일지라도 영적 싸움은 면제되지 않는다. 또한 나그네의 땅에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갈 때 만나는 적()은 사람이 아니라 정욕이다. 이 정욕은 이미 통찰한 바 이전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私慾, 1.14b)이다.

바울도 이미 사도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면서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도 자신 안에 두 법이 공존함을 탄식한다(7.7-25). 바울의 유명한 ‘I’() 메시지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1-24)

이렇듯 영적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5.16-17,24-26)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길에서 육체의 정욕에 발목 잡혀 거룩한 제사장적인 소명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금 성령님의 은총을 갈망한다. 아무리 목표가 좋고, 꿈이 그럴듯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영혼을 거스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지켜주지는 못한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이미 구원받았어도(1.1-12), 그리하여 거룩과 사랑과 성장을 통해서(1.13-2.3)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어도(2.4-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소욕은 끊임없이 성도의 가는 길을 위협하고, 그리하여 사탄은 이 땅에 울려 퍼질 영광스런 제사장교향곡을 실패하게 만들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기억하게 된다.

   

 

12

 

   “여러분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보고

    그들이 회개하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현대인의성경)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삶의 무대는 너희와 이방인과의 서로 공존이다: “이방인 중에서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너희 선한 일을 보고 .” 저들은 한편으로는 비방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보고 있다. 세상과 이방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열심히 자기 일에 열중하면서도 옆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다 듣고 보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교회를 비방하고 모함하고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 어찌 세상뿐이랴. 우리 자녀들이 보고 있고, 배우자가 보고 있고,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이 보고 있고, 또한 성도들이 보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친히 보고 계신다.

세상의 비방을 부끄럽게 하는 길은 없을까. 있다. “행실을 선하게 선한 일을세상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도의 삶이 왜 이래야 되는가를 주님으로부터 배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오늘 우리시대처럼 주님의 영광을 부끄럽게 만든 못난 언행(言行)들이 또 있을까 싶다. 모든 비리에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되지 않으면 사건이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니 세상의 비방과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이제는 선한 행실로 살 때다. 거룩한 제사장의 무대는 세상이다.

   

 

부스러기 묵상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7)

 

성도의 선한 행실과 선한 일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게 되는 하나의 통로다.

이방인들이 악행자(惡行者)라 비방하다가도 흩어진 나그네, 그렇지만 거룩한 제사장인 성도들의 아름다운 언행(言行)을 보고,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는 그날에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 소망한다. 베드로는 거룩한 제사장의 첫 번째 무대는 이방인들과의 이중주(duet)라 말한다. 이 듀엣은 행실이 선하고 선한 일을”(12) 통해서 이방인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풍성한 삶이란 이렇듯 왁자지껄하거나 요란하지 않고 말없는 선한 행실에서 결정된다.

거룩한 제사장의 삶의 무대는 교회가 아니다. 기도원이 아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거룩을 키재기하라고 위대한 신분(9a,10)과 위대한 사명(9b)을 맡기시지 않으셨다. 가장 고질적인 신앙의 병() 가운데는 내가 잘 믿는다, 내가 더 능력 있다, 내 기도가 더 쌔다, 내 은사가 더 좋다, 나는 기도 많이 한다, 나는 성경을 수 십 번 읽었다, 나는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나는 기도만 하면 다 응답된다, 내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하라 하시더라,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자기처럼 예수 믿지 않으면 다 틀렸다.”고 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 버리는 것들이 있다. 그러고도 목소리만 크면, 센 발음과 확신에 찬 강한 소리만 나오면, 마치 그것을 능력의 대명사처럼 사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정상적이고 성경적인 영생생활마저 위협받고 있는 시대를 살아간다.

하나님은 나 혼자 잘 믿은 것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신앙은 골목대장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제사장들인 성도들을 이방인 속에 보내셔서 저들에게서 우리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평가하시겠다 말씀한다. 이미 나에게도 이방인 평가제가 도입되어져 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가 그 기준이 된다는 진리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쉽게 찾아진다(7.15-23, 25.31-46). 신분은 수준을 자동적으로 성취하도록 하지 않는다. 수준은 신분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나의 신분(1.1-2.10)은 나의 수준(2.11- )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내 마음과 삶에 뿌리내리고 열매 맺게 해야 한다.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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