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둔다(히 6.9-20).

20220708(Heb. 6.9-20)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거둔다.

  

 

    본문 관찰

 

    인내하기(9-12)

    격려하기(13-20)

    아브라함약속맹세(13-18)

    소망갖기(19-20)

  

 

인내, 그리고 약속

 

초보에서 완전에로 이르는 신행로(信行路)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원에로의 신분의 변화는 즉각적이지만 성장과 성숙에로의 수준의 변화는 점진적이다.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한송이 국화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만 하는 것처럼 성도로 거듭나 성도다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고(忍苦)의 세월들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가 단조풍(短調風, 1-6)에서 장조풍(長調風, 9- )으로 멜로디가 바뀌면서 이런 단어들이 눈이 띄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구원에 가까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

 

 

인내하기(9-12)

 

히브리서 기자는 갑자기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에게는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9)한다 라고 말한다. 무엇에 근거한, 누구를 향한 말일까 궁금하다. 초보에만 머물러 있는 자들과(1-2), 타락한 자들(4-6)에 대해 슬픈 노래를 부르더니 희망의 멜로디로 코드(code)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히브리서의 첫 번 독자들은 유대주의(율법주의)와 유대교의 옛 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들을 복음과 자의적으로 섞은 무리들, 그리고 이미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10b)한 자, 이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제 누가 진짜인가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런 혼미의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10절과 같은 열심으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11)을 간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경주하지 못하고 한번 맛보고 타락한 자들”(4-6a), 즉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맛보다가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 버리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영적 미성숙(1-6)을 이겨내면서 다음과 같은 자세로 살아간다면, 마침내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 받는 자 되게 하려는”(12) 섭리를 이루는 영광스러움을 누리는 장성한 자’(5.14a)가 될 텐데 어리석게도 도중에 추락하고 말았다는 점, 이것이 여러모로 아쉽다.

조금만 더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11-12) 인내하기에 성공했다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分辨)하는 자들”(5.14b)로 살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랬으니까(13- ). 나 어려우면 신앙까지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고난과 고통이 가중되는 핍박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잠시 살려고 영원을 포기하며 산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격려하기(13-20)

 

인내하기의 모델(model)은 단연 아브라함이다(13-15, 22.15-17).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가능했던 핵심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는 점이다. ‘타락한 자들’(6a)과 구별되는 히브리서의 첫 번 독자인 사랑하는 자들’(9a)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9b)는 이유는(원래 10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된다) “이미 이제도 섬기는 것을”(10) 하나님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주었던 끝까지 믿음과 오래 참음을 통해 계속되는 배도와 핍박의 때에도 이를 놓지 않고 본받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맹세하셨고(13-14,16-18), 아브라함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15). 이 구조가 가장 확실하고 또 건강하다. 왜냐하면 소망하기(9-12)의 성취는 아브라함에게서 끝나지 않고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18b)까지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18a) 바로 그 신실하심에서 비롯된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시절에 구원에 가까운”(9), 그래서 이를 위해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11-12) 살아가야 할 사람은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분명해졌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맹세로 보증하고 계시기 때문에 영혼의 닻처럼 든든하다. 이 소망의 예증(case)을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할 수 있기에 더없이 안심이다.

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휘장(揮帳, 19b, 26.31-33) 안으로 앞서 가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이기에 이 약속만큼 더 확실한 격려는 없다. 이로써 히브리서는 다시 510-11절을 자연스럽게 다시 이어간다.

 

 

부스러기 묵상

 

약속 그리고 구원이 아브라함을 넘어 나에게까지 가까이 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맹세(13,16-18)에 의해 이미 아브라함에게 성취되었듯이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물론 동일한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도 이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젠가 주님의 뒤를 따라 휘장(揮帳) 안으로 들어갈 그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아브라함처럼 살아보자. 이를 위해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자.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한 맹세를 지키실 것이다. 이것이 소망갖기(19-20)의 이유다.

내가 아브라함처럼 살았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19a), 그래서 지성소와 성소 사이를 막고 있는 휘장을 지나 영혼의 닻을 휘날리며 예수님(대제사장)의 뒤를 따라 휘장 안으로 들어가”(19b)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브라함에게마저 은혜의 약속과 하나님 자신의 맹세가 우선하였고, 그는 그 약속을 받은 수혜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셨더니 저가 약속을 받았느니라.”(13-15)

하나님의 맹세와 아브라함의 성취 사이에는 장구한 세월이 들어있다.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래서 약속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언약마저도 인간(아브라함, ‘’)의 순종과 믿음과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때가 되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인내자(忍耐者)가 받은 보상이다.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은 이를 성취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생각해 본다. 아브라함처럼 말씀 하나 붙들고서 오래 참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누리고 싶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만큼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겠지.

[무료OO신학원]이라는 사이비 이단에 빠져 사탄의 회()의 교주에 불과한 망나니를 메시야라, 또 다른 보혜사라, 재림예수라 고백하는 자매와 그 가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본문 앞에 서서 묵묵히 생각해 본다. 그 자매 역시 사랑하는 자들’(9a)의 품에 다시 들어오는 날이 있기를, 그래서 권면하고 기도하는 일 역시 오래 참음으로 감당해 오고 있다. 복음의 기초에 견고하게 선 남편의 마음은 오죽하랴. 형제를 봐서라도 주께서 내게 끝까지 저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섬기게 되기를 기도한다. 형제의 인내를 주께서 기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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