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고후 1.12-24).

2020927(묵상)

  

 

 

갈등은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2 Cor. 1.12-24

  

   본문 관찰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다시 너희에게 가서 유대로

   경솔히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우리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그리스도는 하고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방문계획 변경에 대한 변()

 

목회는 종종 살아있는 생물(生物)에 비유되곤 한다.

마치 럭비공처럼 살아있어서 과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이 불가할 때가 많다. 어쩌면 지금 바울의 형편이 그러하다.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하면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고 비난하고, 방문 계획(14-15)을 변경하면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진실치 못한 사람이라 하여 [바울복음]의 신빙성마저 무시하면서 비방에 열을 올린다.

이처럼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는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깊어가는 갈등의 골을 해결하기 위한 바울의 해법을 주목하게 된다. 사실 방문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 고린도후서를 쓰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만큼 이것은 민감한 주제였다.

한편 좀 더 좁혀서 적용점을 찾는다면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라는 [갈등 클리닉]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라는 앵글에서 본문을 읽는 것도 매우 유익하겠다 싶다. 조그마한 문제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갈등의 첫 단초를 푸는 것은 바울에게서 시작된다.

   

 

바울의 마음보기(12-14)

 

동일한 사건을 보는 두 시각을 만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는 계획이 변경된 것을 두고서 우리’(바울)저희’(고린도교회)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먼저 고린도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을 비난하고 거부하는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바울은 저들이 만들어낸 갈등을 오히려 저희를 사랑하고 복음으로 품는 기회로 삼는다. 저희는 비난과 비방으로 나왔으나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교회를 더 새롭게 하는 또 하나의 기회로 삼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교회로부터 주어진 갈등은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중보기도 주고받기(11)는 교회를 보는 눈을 맑고 건강하게 했다. 그리고 바울을 하나님 앞에 서있도록 했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 앞에서도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첫째로,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12a) 대면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둘째로,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12)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육체의 지혜하나님의 은혜가 각각 대조를 이루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과연 그렇다. 만일 바울이 작금의 문제를 육체의 지혜, 곧 사람의 지혜로 바라보았다거나 해결을 시도했었다면 제일 박수하며 좋아할 자는 바로 사탄이고 고린도교회로부터 바울을 분리시키려는 자들의 악행에 말려든 것이 된다.

셋째는,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13a)였다고 말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참으로 뛰어난 절제함이다. 넷째로, 진정한 진실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14) 것까지 내다봄으로써 오늘의 갈등이 미래에는 자랑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의 갈등은 절제하면서 내일의 자랑은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갈등과의 결별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때부터 바울을 공격하는 자들을 바울은 절제된 언어를 통해 드러낸다. 이들은 다름 아닌 육체의 지혜’(12)를 따라, 지금껏 바울이 전한 완전하고도 온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13)이자 부분적’(14)으로 아는 것을 쓰는 자들이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과 은혜로 행하는 지금껏 전파해 온 바로 그 완전한 복음에 기초한 바울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방문을 미룬 이유읽기(15-24)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서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15a) 고린도교회를 한번 더 방문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이 연기(변경)되었고, 그랬을 때에 고린도교회가 참고해야 할 점은 바울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거기까지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싶다. 바울이 가장 하고자 하는 복음전하기가 이처럼 되었을 때에 사실 가장 마음 아픈 쪽은 당연히 바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바울 흠집내기의 빌미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비난하는 자들이 추측하듯이 경솔히 세운 계획이었거나, 육체를 따라 계획했거나, 이기적인 동기에서 쉽게 예가 아니오로 바뀐 것은 아니다(17-18). 이를 위해 바울이 자신의 진심을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음이 매우 특별한 대목이다(18-22). 그럼 방문을 미룬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바울은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23b)고 말하면서 여기에 대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23a).

또 다른 이유는 돕는 자가 되려는 의도로 계획을 바꾸어 직접 방문하는 것을 대신하여 편지를 쓰고 있다는 얘기다(24).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어보면, 어떻든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믿음에 굳게 선 자들이 있기 때문에 저들의 믿음을 지배하면서까지 외부의 힘에 의해, 강압적으로, 그러니까 우리’(19a)의 입장에서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제 믿음에 굳게 서 있을 만큼의 성숙을 이루었으니까 자체적으로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울의 열린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바울은 늘 함께 더불어 일하는 자들에 대한 동역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직접 가서 얽히고 설킨 고린도교회의 그 많은 문제들을 수술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은 회피한 것도 아니고, 나 몰라라 방관한 것도 아니고, 불난 집 구경하듯 저들의 문제를 먼발치에서 즐긴 것 역시 아니다.

사실 언제까지나 젖먹이 아이처럼 모든 문제를 일일이 다 콩나라 팥나라 간섭하는 것으로는 결코 영적 유아기를 벗어날 수 없다. 고린도교회가 희망스러운 것은 [고린도전서]가 전해주는 참담함 그 와중에도 저희가 믿음에 섰음!”(24b)이라는 신뢰를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영적 코치(coach)로서 이 부분이 고린도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부스러기 묵상

 

4면의 유리관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목회(牧會).

지금 바울이 만난 문제는 오늘 식으로 하면 이런 것이다. 교회가 오랫동안 준비한 어떤 행사를 두 번 씩이나 뒤로 미루었다고 가정해 보자. 어찌 보면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은 게 교회다. 말 많은 것이야 그렇다 친다지만 이게 그만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심각한 분란의 원인이 되어버렸다. 서로 감정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이런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목회자의 귀에 들린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럴 때 어떻게 이 갈등을 해결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례(case)에 해당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절제한다(12 13). 그리고 비록 오늘은 갈등을 심었지만 미래에는 그것이 자랑이 되어 열매 맺을 것을 바라본다(14). 그렇기 때문에 방문할 계획이 미뤄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결정하게 된 이유는 이제 고린도교회의 믿음 정도면 고린도전서에 지적된 옛사람의 모습 정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벌써 시각이 다르다.

갈등 때문에 또 다시 실패의 목록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맺는 결론이다. 갈등이라는 문제에 발목잡혀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끝없는 논쟁과 언쟁으로 허송세월(虛送歲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고린도교회의 못된 유대주의자들은 적당한 명분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바울 흔들기를 시도한다. 이것은 우리와 너희 모두를 위해서 바른 모양이 아니다. 상생과 공존이 아니라 공멸이다. 이게 사탄의 노림수 아닌가.

어릴 때 시골에서 겨울이 되면 보리밭 논두렁에 서서 꼬리연을 달리던 기억이 난다. 바람이 거세지거나 연이 중심을 잃은 듯 싶으면 실을 풀어주면서 적절하게 연의 높이를 조정한다. 그러다가 바람이 약해지면 줄을 열심히 감아주면서 연이 추락하는 것을 역시 조절한다. 높이 날게 하겠다고 바람과 연의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를 하면 연은 그만 원을 그리면서 논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연과 그것을 날리는 사람에게 바람은 기회이면서 동시에 위기다. 또한 불어오는 바람(갈등)은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바람도, 연도, 연줄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연을 날리는 사람이다. 바울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어떻게 바람타기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볼수록 탁월한 지도자로서의 지혜와 완숙함을 보게 된다. 그는 고린도교회가 만든 문제만을 보고 있지 않다. 그 문제 너머에 있는 해답까지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를 위해 육체의 지혜와 육체를 따라 복음과 다른 것을 사용하는 자들과 달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언행한다(18-22).

동시에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19b)를 아는 복음에 서 있는 고린도교회의 믿음있음을 신뢰한다. ‘자기 생각’(육체를 따라)이 만들어낸 결론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갈등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품고 있는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체가 되는 것에 합력하게 하는 바울의 탁월함이다. 바울처럼 넓은 가슴을 따라 사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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