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香氣(고후 2.12-17)

20200928(묵상)

   

 

 

그리스도의 향기(香氣)

2 Cor. 2.12-17

  

   본문 관찰

 

   드로아에 이르매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의 말씀, 순전함으로!

 

바울에게 있어 고린도교회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12-13).

내 형제 디도’(13a)를 만나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듣고 싶어서 드로아(Troas)로 갔으나 만나지 못한다. 후에 디도를 만나고 나서야 회복되는 것을 보면 그가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7.5-7). 이런 형편이었으니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렸음에도 오직 디도를 만날 목적으로 마게도냐(Macedonia)로 이동한다. 물론 그 사이 바울은 계속해서 심령이 편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복음 사역까지 휘청거리게 만들었고, 깊은 영적침체(靈的沈滯)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역시 사도는 사도다(14-17). 달라진 것은 없어도, 환경과 상황은 여전히 안개정국이어도 주님을 향해 눈을 들면서 생각과 마음을 바꾸니까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가 바뀐다: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 잠시 혼돈스러워 했으나 사단에게 속지 않고(11), ‘항상’(14a)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리로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혼잡하지 아니한, 오직 순전한 말씀의 깃발을 높이 든다(17).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기 위하여!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12-13)

 

   “드로아에 이르매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12-13)

 

이 와중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드로아(Troas)에 갔고, 마침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12).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복음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근심도 잠시 잊을 수 있게 될 것 같아 한시름 놓인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디도의 오지 못함으로 막히자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마게도냐(Macedonia)로 갔다(13).

바울은 삶의 평안을 잃었으며 흔들리고 있다. 바울도 이럴 수 있다니 좀 의아스럽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문제는 그를 흔들어 놓았다. 기회를 얻은 복음 전파의 현장마저도 포기할 정도였으니 그의 영적침체(靈的沈滯)가 보이는 듯하다. 고린도교회를 더 시리도록 아픈 사랑으로 품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저들의 형편이 영적 장애아(障碍兒)와 같았기 때문이다.

한 생명이 사람다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 부모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고도 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지금 부모(바울)와 자식(고린도교회) 둘 다 아프다. 고린도교회만 아픈 게 아니다. 영적 부모인 바울도 함께 산고(産苦)의 고통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하노니”(4.19).

아내가 아프면 남편이 아픈 법이고, 자식이 고통 당하면 부모는 가슴에 검게 탄 멍이 드는 법이다. 왜 그런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처럼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동생들은 언니나 오빠나 누나나 형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잘 모른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어쩌면 내리사랑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지금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이처럼 열애(熱愛) 중이다. 바울에게서 고린도교회로 사랑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고린도교회는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방문하겠다는 계획이 취소되고 연기된 것을 꼬투리 삼아 변덕스럽다며 바울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사랑의 열병을 더 심하게 앓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향기(14-17)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

 

바울이 앓는 사랑의 열병은 고통과 좌절을 낳게 만든 고린도교회 때문이다. 이것은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13) 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파국 쪽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바울은 언제까지나 이런 연약함에 떠밀려 가는 것으로 방황하지 않고 곧바로 영적(靈的) 균형을 잡는다. 이게 14절이 갖는 위대함이다. 읽을수록 바울다움으로 다시 회복된 것이 아름답기만 하다. 결국 사탄에게 속아 그 녀석 좋은 일만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1).

영적침체(靈的沈滯)를 반전시킴으로써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라!”의 신앙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14a)는 하나님 때문이다. 바울은 이 하나님을 뼈를 깎는 고통 중에 새롭게 만난다. 승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이 지극히 평범한 진리가 바울을 다시 깨어나게 한다. 이렇듯 그는 뜻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난 셈이다(12-13 14).

다른 하나는,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14b) 때문이다. 그는 영적침체(靈的沈滯)라는 파도가 엄습해 오는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새롭게 발견한다. 이처럼 휘청거릴 때마저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할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의 인생의 목적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바로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바울에게서 배우게 된다.

고린도교회 앞에서는 고통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는데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항상 감사”(14)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13) 괴로워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환경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하나님이 영적(靈的)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항상 이기게 하시”(14a)는 분이심을 감사할 수 있었다. 진정한 영적회복(靈的回復)은 이렇듯 자가발전(自家發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自存感)을 회복한다(15-16). 심령이 편치 못한 고통이 감사로 바뀔 수 있는 것은 그런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울 수 있었고, 고통이라는 대가를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이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감동이 되는 부분이다. 온 몸과 영혼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성 안을 순행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3.1-3)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그와 더불어 고통스러워했던 때가 있었는가.

속상하고, 슬퍼하고, 내 진심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분노하고, 나는 잘못이 없고, 모든 문제의 원인과 발단은 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것만큼 나의 고통과 슬픔만이 더 커 보이는 그런 적이 오히려 더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13) 하는 상태를 살아가는 부조리한 신앙이 아닌가. 때문에 이처럼 살아서는(12-13) 결코 영적 자유함과 기쁨은 요원하기만 하다.

비록 삶이라는 형편과 상황이 그리스도인다움을 마구 흔들어 댈지라도 한결같이 항상 감사하노라!” 외치며 살 수 있는 영적 성숙과 깊이가 없이는 늘 불어오는 파도에 정신 없어 하다가 시간만 축내며 허송세월(虛送歲月)할 뿐이다. 아무리 희망의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캄캄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14a)는 하나님을 인하여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다움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양다리(12-13 14-16) 걸치고 적당히 살아가는 모습만큼은 버리고 싶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17a) 하는 사람이다. 여기 혼잡하게 하다’(kapelos)라는 헬라어에는 포도주를 물에 섞어 판다든지 하는 포도주 소매상을 말할 때 쓰이는 단어다. 바울은 순전한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와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는 그런 혼잡스런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교훈한다.

더 이상 망하는 자들에게서 나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고린도교회(‘’)로부터 흘러나오지 않게 되기를 부탁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곳이어야 한다. 세상의 원리와 방법들을 말씀과 섞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혼잡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불순물이 맑고 깨끗해야 할 교회를 죄로 가득하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를 읽는 모든 성도('독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어떤 냄새가 나고 있는가를 자문자답(自問自答)토록 하고 있다.

근심하게 한 자’(2,5a)로부터 시작된 고린도교회의 혼란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17a) 하는 쪽으로까지 확장되어 버렸다. 이것은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15a,16a)를 풍긴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서는 사탄의 사악한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11).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 얻은 자들에게서 나야 할 향()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16b). 이것이 교회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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