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vs 사랑인(고전 8.1-13)

20200613(묵상)

    

 

 

지식인 vs 사랑인

1 Cor. 8.1-13

 

   본문 관찰

 

   판단 기준은 사랑이어야 한다(1-3).

   우상에 바쳐진 고기 먹는 일 - 지식의 관점(4-6)

       ‘그러나(7a)

   우상에 바쳐진 고기 먹는 일 - 사랑의 관점(7-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b)

 

  성도의 자유가 음행과(5-6), 그리고 이번에는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이어진다(8.1-11.1).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의 기준을 지식에 둔 사람들은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먹을 수 있었다(4-6). ‘그러나’(7a) 지식 있는 자들이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자유함이었지만 이를 본 믿음이 약한 자들 중에 시험에 든 자들이 있었다(9-10). 이 경우에 문제가 되지 않는 자들의 행동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b) 이것이 우상의 제물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이다.

 

 

판단 기준은 사랑이어야 한다(1-3).

 

지식의 문제는 여기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교만한 마음이 지배하는 자들이 없기를 바랐으나 스스로 교만하여진 자들이 많았다(4.6,18, 5.2). 이게 다 세상의 지혜(사람의 말)에게 그리스도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1.5)게 했던 감사를 팔아먹어 버린 결과다. 그리하여 [육신에 속한 자](온전한 자, 신령한 자, 3.1)들이 교회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것의 열매가 사색당파(四色黨派, 1.10-13)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b), 즉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다. 그렇다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허물어뜨린다는 얘기 아닌가(이게 고린도교회의 실상이다). 이것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24)는 말씀과 함께 좀 더 온전히 드러난다.

결국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어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는 지식이 될 때 그는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2)을 드러내는 지식인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지만 지식이 아닌 사랑을 통해 공동체(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지어져가는 몸, 하나님의 교회, 12.12-26)를 세우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처럼 교회를 세우는 사람을 하나님은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신다(3).

   

 

우상에 바쳐진 고기 먹는 일 - 지식의 관점(4-6)

    ‘그러나’(7a)

우상에 바쳐진 고기 먹는 일 - 사랑의 관점(7-13)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지식을 무용(無用)하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이 공동체를 쑥밭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지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 그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을 말하면서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4)는 말씀에 의거해 그 제물을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역설한다.

사실 세상에는 자칭 신()이라 칭하는 것들이 -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신(人造神)에 불과하다.- 많다(5). 그러나 오직 한 분 하나님과 오직 한 분 예수님이 계실 뿐이다(6). 바로 이런 것에 기초하여 제물을 먹는 자들은 당당(자유)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지식을 가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

 

그러기에 바울은 우상에 바쳐진 고기 먹는 일이 야기한 문제 앞에 지식이 아닌 사랑의 관점(7-13)을 제시함으로써 혼란에 빠진 고린도교회를 클리닉하려고 한다. 바울의 관심은 지식이 있어 먹는 자가 아니라 그들을 보고서 이 지식이 없음 때문에 양심이 약하여진 자들이다(7,9,10,11,12).

결국 양심이 약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 해결의 열쇠다(7,9-10). 왜냐하면 그를 위해서도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11). 공동체는 나 옳다고 내 방식대로 앞만 보며 치고 나가는 돌격대들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 되지 않아 아무렇지 않다면 나의 언행(言行)이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너에게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와야만 내 자유함은 의미가 있다.

나를 자유케 한 지식이 약한 자들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될 수 있음을, 그런데 이것이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12). 결국 사랑 없는 지식이 나와 너 모두를 다 무너지게 한다. 바울은 다시 우리(8) vs 너희(9)의 그림을 통해 너희들 역시 우리처럼 자유와 사랑이 분리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자유(지식)가 사랑의 통제와 지배를 받을 때에만 그 자유는 덕이 된다. 사랑이 없는 지식(자유)이 몰고 온 고린도교회의 혼란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지금 이러한 현실을 진단하는 바울로서 그가 내린 해법을 주목한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3) 타자(他者)를 위한 삶 안에서 자유를, 동시에 사랑의 법을 이루기를 원한 권리마저 포기하겠다는 바울에게서 내가 추구해야 할 삶의 양식을 본다.

 

 

부스러기 묵상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13.5b)

 

보통의 공동체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사람을 성토(비난)하고, 더 나아가면 믿음 없는 자라고 따돌리고, 그래서 상종하지 않아야 할 사람쯤으로 치부해 버린다(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하지만 바울은 이 사람(‘약한 자’)이 아닌 자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이들 중 하나는 지식이 있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 있는 자들이다. 과연 누가 우상의 제물을 먹고 양심이 병든 약한 자들을 살릴 수 있는가. 누가 고린도교회를 다시 주의 몸된 교회로 회복시킬 수 있는 자들인가. 지금 지식과 사랑, 두 날개 안에 고린도교회가 있다.

한편 바울의 해법을 읽으면서 교회가 약한 자를 지식(자유)의 무게에 눌려서 실족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결국은 하향평준화처럼 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자유(지식)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b)는 교만한 결과를 낳지 않도록 하고, 사랑도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덕스러움을 풍성하게 하는, 말하자면 이 둘 다 승리(win-win)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울은 지식(자유)을 따라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의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 시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이 약한 자들의 양심을 더러워지게 하여 결국은 실족하게 될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면, 지식이 이러한 결과를 낳지 않은 쪽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그리하여 약한 자나 자유한 자나 모두가 다 공존으로 더불어 상생하는 교회로 가는 길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보았다.

결국 바울은 약한 자들을 사랑하며 함께 가는 것이 빠진 채 강한 자들에 의한, 강한 자들만을 위한, 강한 자들만의 잔치(자유)라면 그것은 이미 복음의 정신을 잃어가는 것이고, 그래가지고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강한 자들이 만들어낸 문제투성이의 틈바구니에서 교회를 온 몸으로 품고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교회되도록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자의 표상이다.

진정한 지식, 참다운 자유라면 비록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상처 나게 했을 때 자신의 지식과 자유를 동원하여 자기를 보호하고 변명함으로써 약한 자로 하여금 또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고통과 아픔을 가중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인정하는 지식이나 자유는 아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1)라는 말씀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나를 자유케 한 지식이 결국 너에게 어떤 의미와 결과를 낳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피며 살기를 기대하는 바울에게서 지식(자유)의 희망을 본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다시 9절이 눈에 들어온다. 바울은 너희 자유함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는 거치는 것이 되었기에 너희 자유함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거치는 것이 될 가능성이 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이 더욱 빛나게 하는 지식의 자유함을 꿈꾼다. 자유가 얼마나 교회를 풍요롭게 하는가를 이루어가는 사랑을 소망한다. 고린도교회가 잠시 균형을 잃어버렸지만 우리시대의 교회 안에 자유(지식)와 사랑이라는 두 날개로 나는 그런 교회를 꿈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빛에 조명을 받는 지식이기를, 자유로움을 사랑으로 클리닉하며 세워져가는 교회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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