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영성.靈性(살전 4.1-12)

  • 데살로니가전서
  • 양무리
  • Aug 23, 2022
  • 85

20220826(묵상)

  

 

 

종말의 영성(靈性)

1 Thess. 4.1-12

  

 

    본문 관찰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들 서로 사랑함이라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주의 재림이 주는 격려들

 

    “형제들이여,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부탁하며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인가를 우리에게서 배운 대로,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그 길을 따라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더욱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1, 새번역)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데살로니가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질문이다. 재림에 대한 메시지는 특별하지 않다. 단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미 받은(들은, 배운) 바 명령대로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된다(1). 그러니까 언행일치(言行一致)가 재림을 맞는 가장 경쟁력 있는 삶이라는 뜻이다(1-2). 그런데 그것은 거룩’(3-7)사랑으로 꽃피우고 열매 맺는다. 삶이라는 멜로디를 떠나서 재림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교회가 행해야 할 재림신앙이 구체적으로 클로즈업 된다.

 

 

순결하라(1-8)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13b)

      너희의 거룩함이라(3)

      각각 거룩함과(4)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7)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데살로니가교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본능을 따라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사느냐로 드러난다.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을 이방인들처럼 맞이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해 드리며 살아야 하는가를 이미 배운 바 대로 행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이다.

종말론적 영성의 핵심 코드는 거룩이다(3). 그리고 이것은 가정이 거룩하게 보존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며,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요구한다(4). 아마도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은 성적 부도덕(sexual immorality)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붕괴(해체)되면서 급격히 침몰해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방인(불신자)들처럼 음란한 짓에 빠져갔다(5).

하지만 이런 성적인 죄는 바울이 앞서 가르친 대로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피할 수가 없다(6). 그러니까 종말을 주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더러움에서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7, 새번역) 성적인 순결과 구별됨을 거룩이라 하시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점이 성생활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회가 되는 것 같아 감사하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거역하는 사람은 사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8, 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성생활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윤리 안에서 하나로 만난다. 거룩을 종교적인 언행 안에서만 이해해 온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 일수록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으로 흘러가서, 특별히 남녀의 성생활에까지 당신의 거룩이 성취되기를 기대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성령님은 거룩하신 영이시기에 성령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은 이렇듯 거룩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라(9-1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맺어야 할 아름다운 열매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마땅히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 사실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랑의 수고’(1.3, 3.12)가 마게도냐에까지 흘러넘칠 정도로 풍성한 교회였다(9-10). 그래서 바울은 이것 역시 더욱 힘써 행하며 살기를 권면한다.

부도덕해진 성생활 때문에 많은 사람이 빛을 잃고, 가정이 깨지고, 삶의 질이 왜곡되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일그러지는 그런 상황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가짜가 진짜의 옷을 입고 사랑한답시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色慾)”(5)이라는 본능적 욕망을 따라 휘청거리는 데살로니가를 다시 살리는 길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9) 그 사랑을 행하며 사는 것이다.

혼탁해져가는 종말론적 혼돈의 때를 다시 건강하게 되돌리는 힘은 사랑에 있음을 나 역시 믿는다. 이제 다시 회복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있다면 종말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방종하던 생활을 접고 이미 바울에게서 배운 것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조용한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이나 간섭하며 빈둥거리지 말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11b)며 살아야 한다. 아마도 마지막이 왔는데 뭐 일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살후3.6-15). 그만큼 종말을 오해한 것이다. 종말은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 일상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로 믿고 영접한 순간부터 외인(불신자)의 표적이다. 때문에 복음으로 살아감을 통해서 저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소개되는 일은 요원하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계시해 오셨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역시 종말을 오해하고 흥청망청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에게 진짜 복음을 가르쳐(보여) 주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12, 딤전2:1-4 참조). 이를 위해 자신들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말이란 이렇듯 뭐 거창한 구호를 외치고,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부스러기 묵상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13b)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3)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심이니.”(7)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거룩으로 부르셨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으로 그리스도인을 부르신 것은 당신의 거룩 안에서의 영광 가운데 참여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어찌 죄()된 인생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그와 더불어 교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것이 가능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큰 축복이요 은총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자동적으로 그를 종말의 영광으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종말을 종말답게 맞을 수 있는 삶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가 맞는 종말은 외인(이방인)들처럼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으로 그 앞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교회가 주의 종말을 복되게 맞으려면 두 가지, 즉 거룩과 사랑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야 한다고 다시 가르친다.

종말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성도로서 우리시대가 들어야 할 복음이 바로 거룩하라!’(순결하라!)는 바울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고모라 시대를 살아가면서 음란과 색욕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좌초할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고 있고, 도대체 섹스산업에 종사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받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상한 메일들이 무차별적으로 나를 겨냥하고 있는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나를 지키며, 또 앞으로 어린 자녀들의 세상을 무엇으로 지켜줄지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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