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동역.同役(살전 3.1-13)

  • 데살로니가전서
  • 양무리
  • Aug 23, 2022
  • 60

20220825(묵상)

  

 

 

아름다운 동역(同役)

1 Thess. 3.1-13

  

 

    본문 관찰

 

    우리 형제 디모데를 보내노니(나도 보내었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노라

    아버지와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디모데 사역: 너를 보내고, 나는 기도하고!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고 싶은 바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지난 날 사도행전 17장에서도 그랬고(1, 2.17-18, 17.16), 지금 로마의 감옥에서도 그렇다(11). 물론 이에 앞서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이 지역을 몇 차례 더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20.1-4, 고후2.12-13). 그만큼 바울의 마음에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로 그때, 그는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메여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디모데를 그곳에 파송한 것이 그것이다. 바울은 사람으로 더불어 일할 줄 알았고(2), 누구를 보낼 줄도 알았으며(6), 그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할 줄도 알았고(3), 그것과 함께 자신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도 알았다(11-13).

 

 

디모데, 사역보고서(1-10)

 

바울은 디모데와 데살로니가전서의 공동발신인으로 동역할 만큼 그를 사랑했다(1.1). 그는 복음 안에서 낳은 믿음의 아들이다(딤전1.2,18, 딤후1.2, 2.1).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의 때 아닌 소동 때문에 야반도주(夜半逃走)하다시피 한 그곳에 디모데를 보낸다(17.1-10). 그리고 디모데는 무슨 일을 만날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바울의 명령 하나만으로 움직인다. 이것이 바울과 디모데의 아름다운 동역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나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바울처럼 보내고, 또 디모데처럼 갔을까. 당한 것 때문에 괘심해서 그곳을 무시해 버리거나, 또 위험 부담을 안고 가는 것을 어떤 그럴 듯한 이유를 달아서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보낼 마음을 품고, 또 보낼 자가 있고, 무엇보다 기꺼이 거기에 동역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바울, 얼마나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중시하는 바울을 배우고 싶다. 그가 디모데를 파송한 것은 오로지 데살로니가교회와 성도들을 마음에 두고 모든 일을 진행한 결과다. 그래서 저들의 믿음을 강하게 세워주고 격려해서(2), 유대주의자들의 핍박과 환난 때문에 동요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3a, 2:14), 또한 저들의 믿음을 알아보려고 디모데를 보낸 것이다(5).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보고 싶고 사랑하는 영광이요 기쁨인 성도들이었던가(2.19-20).

이처럼 동분서주(東奔西走)한 것은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5b, 2.14) 염려했기 때문이다. 오직 한 길, 영혼을 살리는 복음 사역에 생명을 건 목회자 바울에게서 내가 걸아가야 할 사역에의 소명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디모데가 들려준 저들의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는 것과 사랑에 대한 좋은 소식은 아직도 진행 중인 고난과 역경 속에 있는 바울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와 보람이 되었다(6-8).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낳는다(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9)

 

사역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어떠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복음의 빛을 잃어버리지 않고서 자기가 선 곳을 복음의 영광스러움으로 밝히는 사람을 만날 때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변한 것은 환경이 아니다. 환경은 여전히 좌절과 눈물과 핍박으로 말미암은 고난이 넘실거릴 뿐이다. 그러나 변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며 그것을 삶으로 증명해 내는 것, 이것이 사역자가 꿈꾸는 소명의 성취다.

 

 

바울, 중보기도(11-13)

 

하지만 디모데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교회의 어떤 부족함을 가지고 왔고(10),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만든다.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서 데살로니가교회를 품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10). 바울과 디모데의 사역그림은 마치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하고,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물리치는 아름다운 동역을 생각나게 한다(17.8-16, 딤전2.8 참조).

바울은 자신이 할 일과 디모데가 할 일을 정확하게 분별하였고, 그런 다음에는 철저하게 위임했으며, 또 그런 다음 그는 후방에서 기도하는 자리를 넉넉하게 지킨다. 비록 감옥일지라도 그는 데살로니가와의 만남을 기도를 통해 계속했고, 그만큼 디모데는 탁월하게 데살로니가교회를 목양했다.

대상을 아는 만큼 기도가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교회의 형편을 더 자세히 알았기에 바울의 기도는 그만큼 더 풍성하다. 얼마나 사모하고 사랑했으면 옥중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순간에도 데살로니가을 그토록 열망할까(1,11, 2.17-18). 사랑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이러한 소망은 바울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3.6b)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관계요 만남인지, 나 역시 이처럼 살고 싶고 또 그렇게 목양하며 내 삶을 불태우고 싶다.

둘째로, 서로에게 더욱 많아 넘치는 사랑을 위해서 기도한다(12). 마치 달리는 말에게 채찍을 가하듯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이 사랑이 점차 더 넓게 확장되기를 기도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4.9-10 참조):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풍부한 것처럼 주께서 여러분 서로의 사랑과 모든 사람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12, 새번역)

셋째로, 바울의 중보기도는 종말론적이다: “또 주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든든히 세워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실 때에 여러분이 거룩함과 흠 없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 설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13, 새번역) 바울의 기도는 이미(already) 안에 있는 아직(not yet)을 보고 있을 만큼 깊은 영성(靈性)에서 흘러나온다. ‘거룩함에 흠이 없게!’ , 이 얼마나 위대한 꿈이요 소망인가. 바울은 거기까지 데살로니가교회의 수준이 성숙케 되기를 기도했듯이 이 기도는 그대로 나의 기도가 된다.

한편 거룩’(13b)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일단 여기까지는 도덕(윤리)적인 요소가 없다. 그러나 바쳐지는 순간(, 성물, 제사장,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과 관련됨으로써 세상()로부터 분리되어 순결하게 그것(자신)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거룩은 그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순간 그는 이미 순결하고 거룩한 윤리적인 삶의 질()을 요구한다.

이것은 도덕적인 완전주의(무흠, 無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고 바르고 올곧게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 거룩을 주제로 뭔가 데살로니가교회의 부족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10,13, 4.3-8):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10b) 그리고 이것은 기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부스러기 묵상

 

정말 교회스럽다!”는 게 뭔지 깊이 생각해 본다.

바울 안에 그려진 교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지 절로 신이 난다. 주님은 이 땅의 교회가 이처럼 세워져가기를 기대하신다. 데살로니가교회를 보면서 주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 교회는 바울 홀로가 아니라 디모데와의 동역을 통해, 아니 데살로니가교회로 더불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 당신의 피 값을 지불하고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웠으나(사도행전 17) 지금은 로마의 감옥에 있다. 그러나 그는 디모데와 함께, 그리고 중보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계속해서 저들과의 아름다운 교제와 목양을 계속해 간다. 바울은 사람들과 더불어 일 할 줄 아는 탁월한 사역자였다. 그는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통해서, 자신이 아니라 디모데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와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위한 교회를 세우며 살았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을 가장 원했던 사람, 그리고 거기에 함께 동역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주님께서 헌신된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어떻게 교회를 세워 가시며 성숙하게 하시는가를 즐길 줄 아는 사람,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목회하는 사람, 자기 이름이 채색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교회를 소망한 사람, 로마의 감옥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교회가 잘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이자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라 여기는 사람, 그러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순간에도 중보기도의 끈을 조금도 느슨하게 하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바울이다.

먼 길 가는, 그렇지만 한 길 가는 나로서 바울 앞에만 서면 늘 초라하고 부끄러움 밖에 없음이 아쉽고 서글프다. 하지만 자신의 생애를 불살아 주님의 교회가 교회되는 것을 얻고 싶었던 바울에게서 나의 소명과 사명을 다시금 새롭게 붙들게 된다. 알량한 지식의 파편들을 모아 그럴듯하게 배열하면 설교가 되는 줄 아는 나, 바울의 이야기를 좀 흉내 내고 있으면서 바울처럼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나, 바울이 말한 복음을 조금 이해하기라도 하면 마치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뒤죽박죽인 나, 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공사!’이다.

언제나 이 간판을 떼고서 목회라는 파도를 여유롭고 자유롭게 탈 수 있을지, 정말 그날이 내게 오는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 앞에 서 있다. , 살아있다는 증거겠지! 그것만큼 희망이 남아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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