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人智 vs 신지/神智(고전 1.18-31)

20200603(묵상)

 

 

인지(人智) vs 신지(神智)

1 Cor. 1:18-31

 

 

    본문 관찰

 

    人-말의 지혜(17)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19)

    지혜가 어디 있느뇨?(20)

    神-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21)

    人-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2)

    神-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니라(24)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25)

       [결론]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26)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27)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되셨으니(30)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사랑하라(31)

   

 

지혜논증(1)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19, 29.14; 비교. 5.12-13)

 

고린도에 복음을 전할 때와 지금 편지를 쓸 때의 바울은 변함이 없다.

, 그는 말의 지혜가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고린도교회는 말의 지혜쪽으로 이동해 버렸고, 이게 결과적으로 사색당파(四色黨派, 12)라는 분쟁의 몸살을 앓게 만들어 버렸다(10-11). 이것이 지금 1장의 흐름이 지혜논증으로 넘어가는 이유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가 다시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이런 분쟁은 자칫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헛되게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세상)의 지혜가 자리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바울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렇게 허물어지면 결국에는 심판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19, 29.14).

 

 

말의 지혜: 세상/멸망 심판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구원 택하사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찾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22-23a)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4b)

 

고린도교회는 현재 분쟁’(1.11, 11.18) 중이다. 아마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1.2a)이기 이전, 그러니까 지난 날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12.2) 따랐으나 이제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된 말의 지혜’(1.17)가 다시 하나님의 지혜’(24) 그리스도의 지혜’(1.24,30)와 충돌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분쟁이었던 것 같다. 또한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다시’(5.9)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게 한 이유다.

바울은 주께서 자신을 보내신 이유가 복음을 전하라는데 있음을, 그러나 이는 말의 지혜’(17)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교회는 복음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그 증거가 분파주의다(1.12-17)- 동시에 이와 대립각(대칭)을 세우는 말의 지혜가 부각되고, 이게 복음과의 관계에서 분쟁’(1.11)으로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 주의 복음(‘십자가의 도’)이 사람들의 말에 따라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게 다 옛 사람으로 살 때에 따랐던 사람의 지혜가 되살아남으로 가져 온 결과다.

그럼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고린도교회에 보내셨을 때 말의 지혜(1.17),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1.19)-하지만 실상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1.20)- 복음(福音)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1.17b)었다. 그렇다면 지금 고린도교회가 분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사람의 지혜 때문이 아닌가.

다시 이방인으로 있을 때’(12.2)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의 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것이 118절에서 바울이 높이 들어 올린 복음의 깃발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서 바울은 곧바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구약의 한 말씀(사건)을 예로 들어 쐐기를 박는다(1.19, 29.14 참조). 따라서 헬라인들처럼 이런 헛된 지혜를 찾으면 분쟁만 있고, 그 결과 참 지혜이신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말의 지혜를 통해 교회 안에 분쟁만 일삼는 자들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1.25)음을 알아야 하고, 더 솔직히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육체로 볼 때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아니하”(1.26)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어찌 알리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1.20b)사 세상에서 지혜 있다 하는 자와 강한 자라 자부하는 자들을 마침내 곧 부끄럽게 하시고야 마시는 역풍이 있다는 것을!(27).

이것이 세상의 지혜의 한계다. 그러므로 말의 지혜가 잠잠해져서 그 결과 분쟁이 매듭지어져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 세상이 외치는 말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하나님을 지혜로써 알아보지 못하였다(21a).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까지 목소리를 높이고, 급기야 교회를 분쟁케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까.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의 복음(지혜)에 인간의 지혜()가 연결될 수 있을까.

말의 지혜는 이 둘을 어떻게든 동선(同線)에 놓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서 비롯된 지혜가 좀 더 우월하다고 설득(논증)하려 한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까지 분파(分派)를 낳은 것 아닌가(12). 때문에 바울은 복음, 즉 십자가의 도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과 처음 교제할 때 누렸던 바로 그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분쟁을 끝내고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다.

그는 2절이라는 깃발을 고린도교회에 변함없이 펄럭이고 싶어 한다. 비록 잠시나마 감사(3-9)를 분쟁(10-12)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지혜’(십자가의 도, 전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세상의 지혜’(말의 지혜, 멸망하는 자들)를 다시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일하신다(26-29). 사람에게 줄을 선 교회로 분열되어 버린 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교회’(2a)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복음을 놓쳐버리면 세상의 기준과 잣대에 따른 천박한 세상 것들이 자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이러라고 고린도교회에게 풍성한 감사목록들(5-7)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이들의 젖 먹는 어린아이 수준은 모자람 없이 모든’(5-6)으로 주어진 감사들을 감당할 수 없다(3.1-3). 이것이 육신에 속한 자인 너희(수신자)와 온전한 자들(‘신령한 자’)인 우리(발신자)의 다른 그림에서 좀 더 분명해 진다(2).

어쭙잖은 땅의 지혜타령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의 모임으로 줄 세우면서 서로가 도토리 키재기나 하고 있다: “나는 ○○에게 속한 자라!”(12) 이것은 고린도교회는 십자가의 도라는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고, 놀랍게도 세상(헬라인)의 지혜를 택한 결과였다. 그러니 내가 속한 자가 네가 속한 자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간혹 교회 안에는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가 상대적으로 다른 교회들에 비해 매우 건강(우월)하다는 생각이 지나친 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별개일 경우가 많다. , 자기는 개차반처럼 살면서 우월하다 싶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에 대리만족하는 경우다. 정작 자신은 천박한 세상의 논리(지혜)를 따라 살아가면서도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가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몫까지를 다 맡아주는 걸로 착각하는 것 말이다.

자신이 바울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바울이 아볼로나 게바 보다 얼마나 우월한가를 말의 지혜를 동원해 증명(분쟁, 분열, 다툼)하려는 것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십자가의 도)을 전파해야 할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들이 고작 한다는 게 교회 안에서 누가 크냐는, 즉 누가 더 탁월한 지혜꾼인가를 다투고 있으니, 바울의 마음, 아니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등 따시고 배 부르면 교회에서도 그럴듯한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인간의 한계일까. 이를 위해 세상의 법칙(말의 지혜)까지를 동원하고, 그래서 세상 앞에서도 자랑하고 싶은 못난 성도(聖徒, 2,30)로 추락할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은 자랑의 각()을 달리 세우라 말한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31)

 

바울의 고린도교회 관찰하기(26-28)는 비유나 혹시나 하는 가정(假定)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목회하면서 만난 성도들의 모습이다. 바울은 저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저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십자가의 도 안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능한 문벌 좋은”(26) 기준이 아닌,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약한 천한 멸시 받는 없는것들을 택하사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게 하셨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자랑스럽게 된 옛 부끄러운 것들을 회상하고 있다(27-28).

그런데 이제 와서 분열(분쟁, 다툼)은 무엇이며, 사색당파(四色黨派)는 무엇이며, 세상()의 지혜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지혜 vs 세상의 지혜를 각각 한 손에 쥐고서 고린도교회 앞에 증거한다: “, 이것 중에 너희들이 취한 복음과 교회는 어느 쪽이냐?” 아마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동시에 쓰라린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어디에도 사도의 절망이 숨 쉬고 있지는 않다. 그는 호되게 고린도교회를 질책하고 책망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마치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향해 회초리를 들 때의 심정으로 자신의 속 깊은 고백을 불처럼 토해 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2a)인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는 사도의 눈, 그의 마음, 그의 심장, 저희를 향한 그의 편지는 내게 맡겨진 하나님의 교회를 항해 사도처럼 살기를 요구한다.

그러려면 교회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바꾸어야 하고, 성도들을 향한 나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야만 하고, 더욱 주께서 나를 향해 바라보시는 그 마음을 따라 먼저 나를 바꾸어야만 한다. 바울스럽지 않으면 내가 토해내는 말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내가 먼저 바울스럽기 위해 나를 주님의 말씀에 쳐서 복종시키는 일에 승리해야만 한다는 준엄한 주의 말씀을 1장 앞에 서서 듣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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