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하기3 - 열 매(고후 9.1-15)

20201007(묵상)

   

 

 

헌금하기(3) - 열 매

2 Cor. 9.1-15

  

   본문 관찰

 

   준비하기(1-5)

      아가야에서는 1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열매맺기(6-15)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너희로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더하게 하시리니

      봉사의 직무 감사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헌금신학(獻金神學)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2a)

 

성도를 섬기는 일’(8-9)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을 1년 전부터 준비하였다(2, 8.10). 부요할 때 가난한 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8,11, 8.14,20). 그것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준비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인지 모른다(1-5). 사실 바울은 저들을 당당하게 자랑해 버림으로써 아름다운 준비를 격려하면서, 동시에 이 헌금이 또한 저희(예루살렘)와 너희(고린도)와 우리(바울과 디모데, 1.1) 모두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11). 이는 그의 분명한 헌금신학(6-11)에 기초한 고백이다. 이 헌금이 온 교회 위에 맺게 될 열매를 바라보는 사도의 흥분이 내게도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아 행복하다(12-15).

   

 

준비하기(1-5)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있는 대로 하라!”(8.11)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3)라고 당당하게 선언해 버릴 만큼 성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 고린도교회는 탁월한 모범을 보였다. 마치 이 일에 바울은 자신의 명예를 다 걸고 있는 듯하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신뢰하고 있고, 이미 시작한 일을 유야무야(有耶無耶) 하지 않고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 것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았다(1-2a, 8.10-12).

그러면서 바울은 동시에 우리가 이 믿던 일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4b)라고 말한다. 바울의 양면전략(3 vs 4)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고린도교회에 적잖은 부담이 되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바울이 정말 교묘한 의도를 가지고 그랬다면 이런저런 오해들(12.16-17)을 시인해 버리는 이런 자충수를 둔 셈이다. 하지만 그가 이를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그만큼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는 어떤 이들의 거짓된 말들보다도 고린도교회와의 끈끈한 사랑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목회자와 교회의 이런 하모니(관계)가 귀하고도 아름답다. 잘하는 것은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는 마음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것과 한 쌍을 이룬다. 무릇 지도자는 이 일에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하고, 또 교회 역시 옳고 그른 이야기들을 다 듣고 소화시킬 수 있는 성숙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환상의 콤비다.

바울은 자신의 자랑이 빈말이 되지 않고 실제로 고린도교회가 성도를 섬기는 일’(구제헌금)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디도와 한 형제를, 그리도 또 다른 한 형제를 제정위원으로 파송하였다(3a, 8.16-22).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미 약속한 헌금 준비하기를 기대했다. 그렇다. 준비된 헌금이 아름답다. 헌금은 단순히 물질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섬김이라는 사랑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열매맺기(6-15)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9, 112.9)

 

준비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헌금신학(獻金神學, 6-9)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바울은 헌금하는 사람을 심는 자’(6,10a)에 비유하여 마치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일반적 원리처럼 주님(교회, 가난한 자, 25.35-40)을 위하여 심는 자 역시 그래야 함을,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7a) 것을 일반적 원리를 뛰어넘는 매우 중요한 원리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심는 자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7b) 앞 문장이 즐겨라는 단어로 시작된다는 것에서도 하나님은 헌금을 마지못해 억지로 내는 자가 아닌 온 마음으로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하지만 다시 바울은 헌금하는 자(‘심는 자’)가 자고(自高)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모든은혜를 넘치게 주실 수 있기에, 그리하여 그가 모든일에 모든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모든착한 일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8).

신앙은 헌금의 뿌리요 생명이다. 이런 탄탄한 영적 기초가 있기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헌금이라는 건물이 넉넉하게 세워지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는(뿌리는) 그런 심는 자를 의롭다 하시며, “그의 의가 영원토록기억될 것이라 말씀하신다(9, 112.9). 이렇듯 바울은 성경에 흐르는 심는 자’(성도를 섬기는 일) 사상을 꿰뚫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미래적 소망인가: “심는 자에게 씨(심을 것)를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10)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주목하시며 가난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또 다시 심는 자에게 변함없이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55.10 참조)시다. 주실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하실 것이다. 동시에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실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 풍성한 열매를 통해 드려지는 너희의 부요한 헌금은 마침내 이 헌금을 전달하는 우리를 통하여 저희’(예루살렘교회)까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적을 일으킨다(11). 구제헌금은 심는 자만이 기적을 일구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를 심는 자(거두는 자) 역시 기적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를 섬기는 자로서의 기쁨을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심는 자들이 하는 일이 곧 [봉사의 직무], 그러니까 봉사의 디아코니아’(이 단어가 5.18절에서는 직책으로 번역됨). 어쩌면 이것이 바울의 헌금신학에서 핵심 코드(code)가 아닌가 싶다. 하나님은 고린도교회만이 아닌 모든 성도에게 공히 당신이 주신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diakonia, 직책, 직무)를 명하셨다.

그럼 이 섬기는 직은 무엇을 이루는가(12-14). 먼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채움으로써 서로 평균케 한다(12a, 8.13-15). 나의 부요가 너의 궁핍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이미 섬기는 봉사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넘쳐나게 한다(12b). 내 헌금의 봉사가 하나님께 대한 너의 감사를 깨어나게 한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동시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는 순종이며, 또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과도 함께 나누는 심는 자로서의 섬기는 직(, diakonia)을 감당하는 것을 인하여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할 것이다(13). 넷째로,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 기도로서 섬기는 자 되게 한다(14). 물질(헌금)은 단순히 너희가 저희에게 주는 것이 아닌 저희가 너희에게 주는 이런 영적 상호작용(spiritual interaction)으로 발전할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교감이다.

이어지는 후렴구와 같은 15절은 지금껏 이야기한 헌금신학에 대한 일종의 찬양송이지 싶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여기 은사(dorea)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4.10)이라 말씀하실 때, 또한 성령을 선물’(2.38, 8.20, 10.45, 11.17)로 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껏 이야기한 [구제파일](8-9)의 결론을 왕의 하사품’(gift)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이 심을 것을 주사 많이 심는 자로(10), 그것도 즐겨(선뜻 행하는, 7b), 그 결과 너희와 저희와 우리까지 모두가 다 섬기는 봉사를 하는 선물을 주셨으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마땅하다. 시너지 효과(the synergy effect)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것 아닐까. 너희가 우리로 말미암아 저희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저희만이 아닌 모두에게 다같이 [봉사의 직무](섬기는 봉사)라는 스펙트럼을 맛보게 한다. 이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은사(선물, 하사품)라는 찬양에 들어있는 넉넉함이다.

   

 

부스러기 묵상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12.16-17)

 

갑자기 사무엘상 17장의 다윗의 장형(長兄) 엘리압이 생각난다.

그는 골리앗을 향한 다윗의 고백(“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6b)을 듣고 형들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28b) 다 굴러온 왕의 자리를 막둥이 다윗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삼상16.6-7,11-13). 공동의 적()인 골리앗을 두고서 같은 편끼리 티격태격 하는 꼴이 고린도교회와 중첩(OL)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내게는 마치 지금 [구제파일](8-9)에서 펼쳐진 헌금신학(獻金神學)의 장엄한 설교와 어떤 이의 말’(12.16-17)이 마치 다윗과 엘리압의 대화처럼 느껴진다. 고린도교회를 함께 세워가야 할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분열케 하는 자들의 시퍼런 칼(비난)이 살아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울은 놀라우리만큼 탁월하게 이 문제를 풀어간다.

마치 골리앗을 물리치면 엘리압은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 없듯이, ‘어떤 이들을 일일이 상대하지 않고서 헌금신학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고린도교회 위에 쏘아 올린다. 이제 더 이상 헌금과 관련된 쓸모없는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잡음이 이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헌금을 빛바래게 하지 못하도록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헌금에 대한 목회적(牧會的) 답변을 써내려가는 바울에게서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본다.

헌금은 분명 열매(6-10). 이 열매는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자라기 시작한다(1-5). 이왕이면 이처럼 섬기는 직을 감당하고 싶다(11-14). 그리하여 이처럼 서로 섬기는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의도인 평균케 하심을 우리시대에도 주님께 드리고 싶다. 많이 받았으니 많이 섬기며 살자! 내게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왕이신 주님께로부터 받은 하사품(선물)이다. 이 선물이 다른 사람들로 더불어 함께 거두는 열매가 되도록 내게 주신 섬기는 직분에 충성하기로 하자. 이것이 주님처럼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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