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하기1 - 원 리(고후 8.1-15)

20201005(묵상)

  

 

 

헌금하기(1) - 원 리

2 Cor. 8.1-15

  

   본문 관찰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금생활(1-5)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 시련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린도교회, 헌금 프로젝트(6-15)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너희가 일 년 전에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있는 대로 하라

      이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너희(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너희)의 부족한 것은 보충함은

      남지 아니하였고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20.35b)

   “마음을 열어 우리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7.2a, 새번역)

 

먼저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넓어졌으니”(6.11), 이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6.13)는 요청은 자녀에게 말하듯 하는 바울의 소원이다. 비록 아직 답지 못한 것 투성이인 상처난 고린도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들아!”(7.1a)라는 마음과 고백에 담아서 말이다. 마침내 위로의 하나님은 고린도교회와 바울을 디도를 통해서 이 일을 성취하셨고, 환난의 파도타기 끝에 기쁨(소원)의 항구에 도착하였다(1.4 7.67.16).

이제 이 복음 실은 배는 다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구제하는 일을 위해 새로운 출항을 시작할 예정이다. 사실 고린도교회(이방인)가 예루살렘교회(유대인)로부터 진 영적 빚을 헌금을 통해 갚게 되는 프로젝트는 1년 이상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10, 15.25-28). 중요한 것은 이를 위해 바울은 헌금하기라는 어떤 성취의 결과만이 아니라 행하기까지의 과정과, 더욱 그 동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마게도냐 교회들이 먼저 이를 어떻게, 무엇으로 감당하고야 말았는가를 함께 나눈다(1-5). 헌금은 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은혜가 보이는 물질로 나타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에게 주신 은혜”(1). 헌금은 우리와 너희와 저희 모두가 다 은혜의 파도타기를 골고루(‘평균’) 나누도록 만든다(11-15). 그러기 때문에 헌금은 사랑이다(8). 헌금생활이 신바람 나는 이유, 분명하다.

   

 

마게도냐 교회들, 헌금 예화(1-5)

 

바울이 사용하는 헌금에 대한 예화는 참으로 실감나면서도 탁월하다. 헌금하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1)를 가장 중요한 영적 기초로 한다. 이 진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진리를 아는 것이 헌금생활을 바르게 한다는 것, 이는 더 중요한 핵심이다. 헌금은 돈의 수량이 아니라 은혜의 분량이다(12.41-44). 이렇듯 은혜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 가운데 하나가 헌금이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의 헌금하기에는 역설이 있다. 저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극한 가난이”(2a) 그치지 않는 중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기쁨과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2b-3) 하였다. 또한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4)기까지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마게도냐 교회들이 얼마나 큰 은혜의 우산 아래 있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사실 자신들도 극한 가난’(2b), 즉 절대빈곤(絶對貧困) 가운데 처해 있었다. 이렇듯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은혜의 강물이 예루살렘으로 흐르도록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힘, 이것이 은혜의 위대함이다. 이처럼 은혜는 환난과 기쁨이 공존하게 만든다. 참으로 빛나는 교회사랑이다. 나만이 아닌 공동체를 품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은혜의 샘이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교훈이 하나 더 있다. 저들의 헌금생활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 주었”(5)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곳저곳으로 생색내는, 그러니까 주께 드리고 또 우리에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께 드릴 것을 곧바로 자기 마음대로 우리에게 주어버리는 것, 이런 그릇된 원리가 마게도냐 교회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것들은 아주 교묘하고도 고도로 포장된 일종의 현대판 고르반일 수 있다(7.9-13). 따라서 헌금이란 일차적으로 내 것 가지고 내가 알아서, 내가 목적하고 원하는 곳에, 내 방식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헌금 안에 은혜의 원리가 흐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로서의 청지기 의식을 따라 헌금하기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헌금이 자기 권력(과시)이 되어서다.

놀라운 것은 헌금하기의 성경적 원리가 마게도냐 교회들 안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게 살아서 역사하는 은혜의 호흡이다. 헌금은 그것이 보이게 나타나는 한 지류이다. 은혜가 헌금을 풍성하게 하고 품고 가야지, 반대로 헌금이 은혜를 크게도 했다가 작게도 했다가 하는 쪽으로 흔들며 주도하게 되면 헌금의 생명력은 그만큼 반감되게 된다. 헌금의 생명이 은혜의 원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린도교회, 헌금 프로젝트(6-15)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2.10)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하기는 1년 전부터 시작하였지만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6,10). 때문에 바울은 다시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6b),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7b)라고 격려한다. 이제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증명해야 한다(8). 이를 위해 바울은 다음 몇 가지 원리들을 제시한다.

먼저, 주님의 성육신 법칙이다(9, 2.5-11). 이것은 주님이 너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그리하여 그 가난함을 통해 너희를 부요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부요를 위해 가난해지는 법을 배워 실행하는 것이 헌금하기 안에 들어있는 영적 원리라고 말한다. 주님이 그러셨다면 그의 제자인 너희(‘’)겠는가. 또 다시 바울은 일반적인 원리에서가 아닌 성경이 말하는, 아니 자신을 십자가에서 값없이 다 주신 주님에게서 헌금의 법칙을 끌어내는 것이 인상적이다(6.16b-18 참조).

둘째로, 자원함의 법칙이다(10-12). 1년이 넘도록 헌금하기가 지지부진(遲遲不進)해도, 환난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위로의 하나님 때문에 기쁨으로 마음과 마음이 연결된 관계가 회복되었을지라도(1.4 7.67.16), 이쯤 되면 넘어질 수 있을 법도 하지만 바울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이 아닌 은혜의 마음이 흐르는 자원함이 낳은 헌금을 끝까지 주장한다. 때문에 있는 대로”(12) 받으시기에 빚을 내어서 하거나, 마지못해서 하거나, 체면 때문과 같은 것은 자원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셋째로, 평균의 법칙이다(13-15). 바울은 만나의 법칙에서 그 원리를 끌어 온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15, 새번역, 16.18) 여기서 평균하게라 함은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부족한 것을 보충함”(13-14)을 의미한다. , 먼저 넉넉한 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고, 나누고, 돕는 것을 뜻한다.

내가 넉넉할 때 네가 부족할 수 있고, 내가 부족할 때 네가 넉넉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서로 도움을 받게”(14b, 현대인의성경)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평균하게 된다. 그렇다면 물질은 마냥 소유하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물질이 넉넉할 때에 가난한 자가 보일 때에야, 그리고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이 모아질 때에야 비로소 헌금의 참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아직 하나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는다면 부요함을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만큼 모르고 있는 셈이다.

   

 

부스러기 묵상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8b-9)

 

우리가 드린 헌금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12).

비록 그 헌금이 교회를 통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쓰일지라도 엄밀히 말하면 그것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믿음이 없이는 바른 헌금을 드릴 수 없다. 하지만 이 헌금이라는 것이 하나님께만 드려지면 사람은 상관없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사람을 위해 잘 사용되기만 하면 하나님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헌금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이를 관리하는 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15-24).

헌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어머님(임인례 권사)이 소천하시면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건축헌금을 15여 년이 지난 후에 마무리한 일이다. 아마도 고향교회 건축을 앞두고 열린 부흥회(1980년 겨울)에서 어머님은 당시로선 비교적 큰 액수의 건축헌금을 작정하셨다. 그리고 1985년 소천하시기 전에 완납하지 못하셨고,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어떤 기회에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다. 당시 건축헌금 장부를 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예상했던 대로 절반 정도가 미납이었다. 다시 연락을 드렸고, 이자까지 계산해 온라인으로 송금을 했던 일이 있었다.

대학 시절 칼국수나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며 책을 사 보는 한이 있어도 헌금을 드리는 일만큼은 부끄럽지 않아보려고 스스로 싸웠던 적이 심심찮았다. 주일이 돌아오면 인두로 다리미질을 해서 성경책 사이에 곱게 꼽아 놓은 헌금을 드리곤 했던 중-고등부 시절이 그립다. 헌금을 드리지 않고 그것으로 사탕을 사먹고 싶은 여러 차례 유혹이 있긴 했지만 감히 하나님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던 주일학교 시절의 마음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끊어지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인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보지만 생각만큼 그러지 못함이 좀 부끄럽다. ‘극심한 가난’(2) 중에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렸던 메게도냐 교회와 성도들처럼 성실함으로’(12.8) 헌금하기에 성공하고 싶다. 받은 복에 비하면 드린 것이 너무 초라하지 않아야 한다. 은혜는 말만으로가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난다. 은혜는 헌금으로도 경험하며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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