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신위론.人苦神慰論(고후 7.2-16)

20201004(묵상)

   

 

 

인고신위론(人苦神慰論)

2 Cor. 7.2-16

  

   본문 관찰

 

   우리가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2-8)

      —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셨으니(6)

      — 7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9-16)

      — 범사에 기뻐하노라’(16)

 

 

위로하시는 하나님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4b)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3b)라는 말에 바울의 심정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고 있음(6.16b-18)에도 불구하고 두 사이가 벌어진 이유는 유대주의적 분파주의자들이 고린도교회의 마음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2-4, 6.11-13). 저들이 허위로 유포하여 덮어씌운 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해치거나 속여 뺏은 일도 없”(2, 현대인의성경)었음을 말하면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2a)고 호소한다. 비록 고린도교회는 우리(바울)를 비난하였지만 바울은 고린도교회(너희)를 자랑한다(2,4a,14).

그러면서 모든 고통과 환난을 품고 기쁨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간다(5 9). 이 모든 일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위로하시는 하나님’(6)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환난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것만큼(5 6 9), 근심을 반올림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바울의 고통신학(苦痛神學)위로를 받았고 안심함을 얻었음”(13)으로 꽃피운다. 이로써 모든 환난 중에서”(1.4) 시작된 고린도후서 전반부(1-7)범사에 기뻐하노라.”(7.16)로 마무리된다.

   

 

우리가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2-8)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셨으니(6)

 

너희의 비난(2)과 우리의 자랑(4a) 사이에서 환난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바울은 여전히 견고하다: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4b)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은 바울이 마게도냐에 갔을 때까지 멈추지 않은 현재진행형이었다(5, 2.13).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은 그 환난의 불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언약의 일꾼(3.6a)은 이처럼 사는 자다.

한편 우리가 환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두려움을 외면하시는 분이신가. 결코 아니다. 그분은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6)이시다. 환난 때문에 육체와 심령이, 또한 안팎으로 다툼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때 하나님은 위로 가운데 바울을 찾아오셨다(5, 2.13).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서 역사되어진다는 점이다(6-7). 이 점은 평범하지만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정말 생각해 볼수록 영적 진수가 그 안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디도와(6), 또 디도를 통해 전달된 고린도교회의 바울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통로인 셈이다(7). 이렇듯 하나님의 위로는 근심을 넘어서 기쁨을 낳는다(8).

디도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통로로 쓰이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리고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사이를 근심에서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화해자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조력자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또한 고린도교회처럼 위로를 전하는 디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겸손함, 그래서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7)을 내고 있는 진보를 언행으로 나타내 보일 수 있음으로 하여 하나님의 위로에 참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꿈꾼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9-16)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9a)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

 

바울의 근심과 기쁨은 전적으로 고린도교회의 영적 온도계와 비례하며 움직인다. 그만큼 고린도교회를 온 몸으로 품고 있음을 본다. “환난 다툼 두려움 근심 후회”(5,8)가 물러가고 지금 기뻐함’(9- )이라는 코드로 변환된 것은 위로하시는 하나님’(6) 때문이다. 디도를 통해서 듣게 된 고린도교회의 소식은 바울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2.4a)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위로 쪽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바울이 기뻐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근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로 회개”(9a, 현대인의성경)하였기 때문이다. , 바울로 하여금 후회하게 했던 그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8a)이 놀랍게도 회개를 잉태하는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바울과 고린도교회가 각각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될 뻔했고, 그것이 바울의 근심꺼리였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10-11)은 회개함에 이르렀고, 이것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이었다.

바울은 놀랍게도 근심마저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체험했고, 그래서 이처럼 고백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루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10) 이뿐 아니라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열심을 일으켰으며, 순결을 변호하게 했으며, 의분을 느끼게 했으며,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으며, 사랑을 사모하게 했으며, 열렬히 헌신하게 했으며, 불의를 징벌하게”(11, 새번역) 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 그지없다. 어떻게 근심을 통해서 이런 놀라운 일을 이루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이를 사람을 통해서 하셨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한다(6-7,13-15). 이것이 디도에게서, 고린도교회를 통해, 그리고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신앙의 유산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16)

 

고린도후서 전반부(1-7)는 바울의 기쁨으로 마무리된다.

시작 분위기가 환난 고난’(1.1,6,7,8)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색깔이다. 고린도교회라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2.15)와 같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자들 때문에 안팎으로 끊임없는 고통 ,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5) 가운데 처해 있었다(5; 2.5a,17, 3.1). 바로 그때 디도를 통해서(6b), 바울이 디도 편에 보낸 편지를 읽은 고린도교회를 통해서(7) ‘위로하시는 하나님’(6a)의 은혜가 바울과 고린도교회 온 무리 위에 넘쳐났다. 마침내 하나님은 환난을 기쁨으로 역전시키셨다.

한 걸음 더 말씀 안으로 들어가 보면,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이 고린도교회다움을 위해 개입해 들어오시는 그날까지 기약 없는 시간들을 묵묵히, 그것도 다툼이요 두려움”(5b)이라는 환난이 공존하는 사역의 틈바구니에서 희망을 붙들었다. 하나님보다 앞서 좌절하지 않고, 고린도교회의 배은망덕(背恩忘德)을 보면서 하나님보다 앞서 어떤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았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13.1b)셨던 주님처럼 말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126.5-6)

 

바울 역시 시인처럼 많은 눈물’(2.4a)이야말로 기쁨어린 수확을 위해 지불해야 할 소중한 영적 자산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고린도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면 자신을 이처럼 드리는 것을 행복으로 받아들였고,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는 철저한 신본주의자(神本主義者)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언약의 일꾼’(3.6)됨으로 드러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할 이유들을 따라 살아갔던 바울이 더없이 커 보인다.

사람들은 주는 것만큼 받지 못하면 생각이 바뀌고, 그래서 마음이 떠나고, 급기야 결별하고 만다. 여기에는 모든 책임이 늘 타자(他者)에게 전가되곤 한다. 그래야만 자신은 심리적으로 부담을 줄이게 되니까. 이런 이기주의(利己主義)는 세상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마도 대부분은 이미 고린도교회(배우자, 직장, 친구, 근심하게 한 자 등등)와 결별하고, 인도하심이라 생각하는 새로운 것(배우자, 사업, 이웃, 비전 등등)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문제 앞에 선, 그것을 읽어내는 시각과 방향,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는 바울을 만난다.

한 영혼을 향해 바울처럼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배우는, 아니 주님에게서 배우는 사역의 한 수가 아닌가. 만약 주님이 나처럼 언행(言行)하셨다면 나는 이미 주님이 더 이상 상대해 주시지 않는 자리로 추락해 있을 것이다. 이걸 알면서도 나는 늘 내 기분과 감정을 따라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따라 행동하는 편을 선택하며 산다. 내가 봐도 이처럼 이중적(二重的)일 수 없다.

바울과 같은 마음을 따라 살지 못하면 앞으로를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까 아찔하다. 바울다움까지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정말이지 언제쯤에나 그리스도인다운 철들 날이 올는지 . 한편 바울이 목회했어도 고린도교회 같은 교회가 현존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을 생각하고, 또 교회를 생각하면서 내가 품고 가야 할 소명의 땅을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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