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교회의 향기(살전 2.13-20)

  • 데살로니가전서
  • 양무리
  • Aug 22, 2022
  • 49

20220824b(묵상)

  

 

 

아름다운 교회의 향기

1 Thess. 2.13-20

  

 

    본문 관찰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13-16)

       너희가 받을 때에 받음이니(13b)

       너희가 본받은 자 되었으니(14a)

       너희도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14b)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쓰노라(17-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너희가 아니냐(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20)

  

 

너희 vs 그들(유대인들)

 

교회의 반응과 바울의 계속되는 관심이 하모니를 이룬다.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수고는 눈물겹다(1-12). 유모와 아비의 마음으로(7,11) 복음과 함께 목숨을 다해 저들을 사랑으로 섬겼다(8). 그랬더니 바울이 늘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저들의 눈물겨운 믿음의 반응 때문이다(13). 고난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 말이다(14). 이런 결과는 유대인들과 얼마나 대조되는 것인지 모른다(15-16). 이렇듯 서로가 복음 안에서 복되고 아름다운 교제를 주고 받았으니 얼마나 그리울까(17-18).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과 사랑이 만져지는 것 같다(19-20).

 

 

선교 리포트(13-16)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13a)

 

데살로니가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교회다움을 넉넉하게 이루며 주변에 영적 영향력을 주면서 성장(성숙)해 갈 수 있었던 힘은 복음을 받는 자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13a) 들었다. 귀로만 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씀을 들을 때에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다해 받아 들였다. 바로 이처럼 받아 들은 바 말씀이 데살로니가교회라는 믿음의 역사를 이룬 것이다(13b, 1.3a). 이것이 말씀에 대한 데살로니가교회의 아름다운 반응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데살로니가교회(이방에 있는 교회)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14a)다는 바울의 지적이다. 이것은 이방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4a) 동일하다는 교회의 동일성에 대한 고백이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 앞에 주님의 교회로서 반응하였다.

무엇보다는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14b)에 있어서 동일했다. 이것은 이 두 지역의 교회가 동일했기에 받은 고난이었다는,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의 동질성을 고난이라는 앵글에서 들여다본다. 교회는 고난 받는 공동체다. 전함으로 받은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대로 흥왕하는 교회가 되면 될 수록 유대인들의 핍박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일은 불가사의 한 일이다.

어떻게 된 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위치가 완벽하게 역전되어 있느냐는 점이다(14-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16) 복음을 방해하는 것은 명백한 죄().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불과 몇 십 년 전에 저들은 직접 자기 눈으로 예수님의 복음서 사역을 똑똑히 목도했던 자들이고, 또 그들의 후손들이다. 저들은 모두 직간접으로 복음의 소식(영향력) 안에 들어와 있었다.

들은 바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세삼 느껴본다.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점점 왕성하게 되느냐, 아니면 유대인들처럼 점점 몰락하게 되느냐를 결정한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말로 시작해서 결국은 마지막은 하나님의 노하심’(16, 1.10, 5.9)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돌이키지 않으면 말이다. 원하든 원치 않던 나 또한 이 둘 가운데 하나의 보고서가 작성되고 있는 중이다. 유대인들의 참상이 졸고 있는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형제들아 너희는(17-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20)

 

이 대목에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 바울이 느껴진다. 믿음의 소문을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각 처에까지(1),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 안에서, 또한 유대인들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그것도 핍박과 고난을 넉넉히 이기면서 당당하게 복음의 깃발을 휘날리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얼마나 자랑스럽고 또 보고 싶었을까. 이것이 지금 이산가족(離散家族)처럼 그것도 원치 않게 서로가 떨어져 있고, 같은 고난 속에 있는, 그럼에도 마음으로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17b)던 이유다.

그리움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데살로니가교회를 만나고 싶은 바울의 그리움은 편지가 되어 날아간다. 나와 주님의 관계를, 나와 성도들의 사이를, 우리 가정을 바울의 고백과 간증에 비추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데살로니가와 바울의 연애처럼 나는 주님을 이렇게 사모하는가. 주님이 나를 이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찾아오시는데 나는 이를 아는가. 나를 향한 주의 사랑과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이 같은 멜로디였으면 좋겠다. 조금씩이지만 그 리듬을 따라 살아갈 수 있고, 주의 말씀과의 하모니를 맞출 수 있음이 퍽이나 다행스럽다.

내가 주님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이라니 (4:1). 감사해서 웃고, 황송해서 울고, 이처럼 나를 대접해 주시니 무엇으로 보답하며 살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번 여름,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해서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단 하나만의 이유로, 그분은 나와 더욱 친밀한 교제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도전, 정말 전율처럼 내게 찾아온 다시 찾고 회복한 복음이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 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복음송 / Wes. Sutton , 인터콥 역)

 

세 아들을 주셔서, 부족하지만 부모로서 함께 살아온 시간들은 나를 아버지가 되게 했다. 이는 ㅁ엇보다 더 많이 하나님 아버지를 그 속에서 깨닫고 보고 느끼고 호흡하며 지낼 수 있게 했다. 내가 아버지로서 느끼는 그 무엇들 안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나를 그처럼 함께 해 주고 계셨음을 깨달을 때마다 누렸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인 나의 친밀한 시간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요 축복이었다.

바울의 심장(마음)을 가지고 목회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요 영광이듯이, 주 앞에서 내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소망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여야 한다. 동시에 교회와 나의 관계 역시 이처럼 영광이요 기쁨이여야 한다. 역시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족들 모두가 이렇듯 서로가 서로에게 영광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으로 살아가야 한다. 주님이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이렇게 살다가,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한다. 이처럼 교회도 가정도...

 

 

부스러기 묵상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너희(데살로니가교회)와 그들(유대인들)의 전혀 다른 두 길이 보인다.

베드로와 스데반의 청중들도 그랬다(2.37, 54). 이처럼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 결과를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멸망으로 가는 길이 선명하게 보인다(15-16). 얼마나 불행하고 가련한 인생들인가. 이렇듯 훼방자(방해꾼)는 늘 내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데살로니가교회가 든든하게 서 가고 있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멋진지 .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또 천국에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도 못들어 가도록 문을 막고, 그것도 부족하여 갖은 핍박으로 자기들의 죄를 채운다.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저들과는 대조적으로 데살로니가교회는 이방에서 복음의 꽃을 활짝 피운, 그리하여 데살로니가교회믿음의 소문이라는 향기가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지나 각처에 퍼지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1.8). 참으로 극과 극으로 나누이는 그야말로 극적인 그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런 고난이 없을 때에 그냥 덤으로 얻은 게 아니고 유대주의자들을 통한 고난(환난)이라는 많은 싸움 중에서 그 값을 지불하고 얻어진 보배다(2,14, 1.6). 그래서 그것만큼 귀하고 복된 간증이자 그대로 도전이 되어 전달되는 것 아닐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무런 값을 치르지 않는 것은 그만큼 값어치가 없고, 그래서 쉽게 취급되고, 아무도 감동하지 않고 사라지고 만다. 바울로 대표되는 우리와 데살로니가교회와 성도들인 너희와 복음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인 그들들이 펼치는 각각의 삶들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흔들거리면서 흘러간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고 있고, 누구를 위해 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주며 사는가. 이에 대해 데살로니가전서가 하나의 등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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