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맥잡기

  • 데살로니가전서
  • 양무리
  • Aug 17, 2022
  • 59

맛있는 신약통독개론(초안: 20160325)

  

 

 

데살로니가전서 맥잡기

1 Thess. 5.23

  

 

    구조 관찰

 

    인 사(1.1)

    바울사역(1.2-2.16)

       칭 찬(1.2-10) - 믿음

       사 역(2.1-12) - 고결성

       반 응(2.13-16) - 믿음

    관 심(2.17-20) - 그럼에도, 그래서

    디모데사역(3.1-13)

       디모데 파송(3.1-10) - 부족

       바울의 중보기도(3.10-13) - 채움1(기도)

    편지사역(4.1-5.2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4.1-12) - 채움2

       주의 재림(4.13-5.11) - 전환(그럼에도 일종의 채움3)

       그리스도인의 삶(5.12-22) - 공동체

    인사와 축도(5.23-28)

 

 

재림과 성결

 

    “바울이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소리 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17.2-6)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AD 50-52) 때에 세워졌다.

빌립보에 이어 그곳에서 단지 3주일을 지내는 동안에 헬라인(이방인) 남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교회가 개척되었다(2.2, 3.1, 17.1-4,13-16). 복음 -바울복음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5장이다.- 은 흥왕하였으나 바울은 곧 대적자(유대인)들에 의해 추방되고(1.2-2.16, 17.5-10), 이어 디모데를 파송하게 된다(3.2). 그러나 디모데가 바울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데살로니가교회는 주의 재림에 대해서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4.11,13-14).

복음과의 짧은 만남 때문이었는지 교회는 영적으로, 교리적으로 큰 혼란 가운데 있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다. 이처럼 환난 중에 있었음은 물론이고(3.3-7), 임박한 재림에 대한 그릇된 이해 때문에 일상생활마저 흔들리는 사람들(4.11), 그리고 주의 재림 이전에 먼저 죽은(사별한) 자들의 장래에 대한 그릇된 이해들이 교회를 흔들리게 했다(4.13-18). 어찌할까.

데살로니가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분명한 복음 메시지였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가 쓰여지게 된 하나의 배경이다. 이런 형편임에도 데살로니가교회는 건강했다(3:6). 그랬기에 바울과 데살로니가교회는 형제들아!”(14)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해서 나눌 수 있었다. 재림에 대한 복음은 저희를 바르게 깨어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바른 삶, 즉 성결한 생활을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을 신뢰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해 본다.

  

 

재림에 대한 소망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1.10a)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2.19)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3.13a)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4.15)

    “주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4.16a)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5.2)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하리니.”(5.4)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5.23b)

     (*표는 원어에 parousia로 쓰임)

 

재림에 대한 소망은 각 장마다 마치 후렴구처럼 메아리친다. 이처럼 사도행전적 교회, 즉 초대교회는 주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회였음을 알게 된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어떻게 사는가. 먼저,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3.13). 여기에는 순결이 포함된다(4.3-7). 또한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고(4.1), 사랑의 계명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3.12, 4.9-10). 특별히 영광스러운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은 결코 나태하게 생활하지 않는다(4.11-12). 여행(군복무, 유학, 출장)에서 돌아오는 가족을 맞이하는 것도 분주하다면 하물며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는 일이야 그 무엇에 비교하랴!

 

     재림의 파노라마

    ① 먼저 배도(apostasy)하는 일이 있고”(살후 2.3a)

    ②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살후 2.3b)

    ③ 주께서 친히 하늘을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a)

    ④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b)

    ⑤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살전 4.17a, 다 변화하리니 고전15.51-52)

    ⑥ (온 성도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7a)

    ⑦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b)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치 밤에 도적(盜賊)같이 임할 것이기에(5.2)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5.6)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물론 재림을 알리는 징조가 먼저 있다(24.36,42, 25.13). 그러므로 초림(승천)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울이 권면하는 7가지 종말론적인 삶을 무지개처럼 항상 내 영혼의 창에 걸어놓고 살아보자(5.16-22). 이것이 신학(교리)과 삶을 일치시키는 길이다.

 

 

성결한 생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1.6-7)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과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1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4.3a)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4.7)

 

내일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는 오늘의 삶을 적당하게 살지 않는다. 바른 재림신학(再臨神學)은 반드시 거룩한 생활로 그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바울의 꿈은 바로 거기까지 가 있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과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3.13) 정말 아멘이다.

그럼 종말을 살아가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기초한 거룩함(3.13, 4.3,7)이고, 사람(이웃)을 향해서는 사랑(3.12, 4.9-10)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자는 마치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자들처럼 입술만 그럴 듯 할 게 아니라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4.11)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이렇듯 신앙은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요구한다.

  

 

부스러기 묵상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5.23-24)

 

데살로니가전서처럼 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자다.

종말은 죽을 때나 맛보는, 주님의 재림 때에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보고, 성취하며, 누리며, 그리고 증거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게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과 동시에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이요 축복이다. 종말은 멀리 있지 않고 가장 가까이 내 곁에 있다. 정말이지 사선(死線) 앞에 서서 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에나 이럴 줄 알았으면 바르게, 다르게 살껄!” 하지 말고, 정말이지 지금부터 종말을 연습하며 살아보자. 그래, 지금 데살로니가전서를 내 안에 심어 성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꿈꾼다.

바울은 주의 재림이라는 때와 시기에 대해 명백한 복음을 전하며 믿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님이 자신이 살아있을 때 오시는 분으로 믿고 살았다. 이것은 그가 잘못된 생각(판단, 신학, 신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는 주의 다시오심’(parousia)을 앙망하면서 살았다. 그는 재림하여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았지만 재림한 주와 지금도 함께 하며 살고 있는 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쳤다.

이것은 재림 이전의 자신과 주의 재림 이후의 자신의 영적인 동질성이자, 그렇다면 재림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와 더불어 친밀하게 사는 것과 연속적이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간적인 재림의 때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오늘의 삶을 자유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내가 오랜만에 만날 아내를 준비하고 있다가 맞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고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가 만나면 전혀 준비되지 않는 만남이 주는 혼돈과, 그리고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의 질적 단절 때문에 어색하기 그지없지 않을까. 사람과의 재회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나의 주님과의 만남이 그러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4.17b)

 

  **

 

신약묵상.jpg

 

      김충만

      맛있는 신약묵상

      가나북스

      2014

 

      데살로니가전서 묵상은 책, pp.387-403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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