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그 다양성과 통일성(고전 12.12-31)

20200620(묵상)

 

 

 

은사, 그 다양성과 통일성

1 Cor. 12.12-31

  

   본문 관찰

 

   하나의 몸과 다양한 몸의 지체들(12-27)

   교회에 주신 은사(28-31a): 다양성과 통일성

   사랑이 은사인가?(31b)

   

 

몸과 지체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25)

 

다양한 은사는 상호의존성에 의해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12-31).

은사는 다르지만 다 유익하다. 나와 은사가 다른 것이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며, 또한 은사는 우열(優等)의 문제도 아니다. 바울은 이를 몸과 지체들의 비유를 통해 매우 적절하게 예증한다. 따라서 나와 너를 비교하여 열등하다(15-20), 반대로 특별하다(21-26)는 생각과 시각을 버려야 한다. 은사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각각의 은사들은 사람이 좋아서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18)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몸에 지체를 두셨듯이’(18, tithemi), 교회 안에 여러 사람을 세우사’(28, tithemi) 당신의 몸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세움을 받은 자는 세운 자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나의 몸과 다양한 몸의 지체들(12-27)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14,19,20,27)

 

몸의 모든 지체가 다 필요하다. 마치 어떤 지체가 몸을 떠나면 쓸모없듯이 교회의 어떤 지체도 몸이신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떠나서는 무의미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여러 지체가 그냥 함께 있는다고 해서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다양한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에 비유된 교회 역시 그렇다.

몸과 지체가 서로 따로 놀 수 없듯이 각각의 은사와 교회는 단순한 동거(집합체)가 아니고 생명 있는 유기체다(12). 비록 모든 지체들이 다 있다할지라도 시체는 죽은 몸이듯이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들 역시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이 아니고서는 이런 지체들로 모인 몸을 교회라 할 수는 없다(14).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런 유기체적 교회, 즉 지체(은사)들의 유기적 연합으로서의 교회인 자는 그가 누구든 그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13) 된 자들이다는 점을 그 무엇보다 강조한다. 하나의 몸과 다양한 몸의 지체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면 한 성령 안에서의 일치라는 끈으로 묶여진 유기체여서다. 이것만큼 은사에 대한 분명한 그림이 또 있을까.

이쯤에서 그러면 교회 안에서의 은사는 어떤 색깔이어야 하는가로 넘어가는 것은 탁월한 흐름이다(15-26). 먼저, “()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라는 식의 내 은사에 대한 열등감을 버려야만 한다(15-20). 만일 온 몸이 눈이라면 듣는 것이 어디에서, 온 몸이 듣는 것이라면 냄새 맡는 것은 어디에서 할 것인가(17). 이렇듯 다양한 지체를 한 몸에 두신’(세우신, tithemi, 18b,28a) 분은 하나님이시다(18-20). 그러므로 은사에 대한 열등감은 이어지는 우월감’(21-26)만큼이나 위험하다.

둘째로, 교회 안에서 은사는 또한 어떤 시각(자세)에서 이해해야 하는가(21-26). 그것은 한 마디로 나는 너를 감히 쓸데없다 할 수 없다(21). 보통은 몸에서 약하게 보이는, 덜 귀히 여기는,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더 귀하고 아름답게 꾸미지만(22-23),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부족한 지체를 더 존귀하게 하신다(24). 따라서 어떤 지체(은사)도 감히 우월하다며 목에 힘 줄 수 없다.

그러므로 건강한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은 이렇게 산다. 이것이 우월감을 버리고 각각의 지체들을 돌아보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25-27, 새번역)

 

 

교회에 주신 은사(28-31a): 다양성과 통일성

 

   ① 사도들(apostolos)

   ② 선지자들(propetes)

   ③ 교사들(didaskalos)

      그 다음은, 능력들(duynamis)

                      병 고치는 은사들(iama)

                      서로 돕는 것(antileptis)

                      다스리는 것(kuybernesis)

                      각종 방언을 하는 것(glossa)

                      통역하는 자(dielmeneuo)

 

은사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이것들은 하나님이 교회 안에 세우셨다는 점이 각 은사의 서로 다름을 읽어내고 이해하는데 더 없이 중요하다(28a). 하나님은 교회에 직분들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은사들도 세우셨다. 잊지 않아야 할 대목은 하나의 직분만도 아니고, 하나의 은사만도 아니라 다양한 사역과 은사를 교회 안에 세우심으로써 이런 직분과 은사들을 통해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고 성숙하기를 기대하셨다.

이것이 직분과 은사의 기본적인 기능이다. 그런데도 이 은사가 저 은사보다 열등하다, 우등하다며 이런저런 낙심과 교만으로 얼룩진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면서 은사는 그 속성상 자칫 이처럼 균형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하나님은 이를 예상치 못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더 중요한(깊은) 것이 은사 안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31b] 사랑은 은사인가?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31b절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 이것은 크게 은사론(12-14) 전체와 연관이 있으며, 작게는 12장과 13장의 연결이 어떻게 되는지를, 동시에 13장이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열쇠(key)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물음은 생각보다 싶게 풀린다. 바울은 [은사장](12-14)을 다루면서 하나의 큰 주제를 일단 마무리한다(1-31a).

그리고 새로운 주제로 넘어서면서 제일 좋은 길’(더욱 특출한 은사가 아니다)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유명한 사랑장(13)을 토해낸다. 사랑은 12장에서 소개한 은사들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일 뿐 아무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13.1-3). 사랑은 은사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제일 좋은 길이며, 또한 사랑은 앞서 소개한 고린도교회의 주요 은사들에 대한 열망은 물론 은사를 따라 사는 삶을 포괄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가장 좋은 길이다.

 

   12

      12.31b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3

      14.1a    사랑을 따라 구하라

 

사랑이 은사인가?(31b) 사랑은 성령의 열매(kalpos, fruit) 가운데 하나지만(5.22a), 바울은 여기에서 또 다른 신령한 은사로써의 사랑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말한 이들 은사들은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더 큰 은사’(highest gift, RSV)를 사모해야 하는가(31a). 먼저 이 표현 속에는 이미 은사들 간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절 속에는 만일 고린도교회가 이미 있는 은사들 간의 서로 다름을 무시하고, 은사를 둘러싼 불협화음을 만들었거나(지나친 추측일까. 만일 그럴지라도 이어지는 논의는 추측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너희’)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하나님이 세우셨으니”(28a)- 것을, 그리고 이러한 균형을 갖게 하는 하나의 창()으로서 사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12장에서 줄곧 바울은 은사를 이야기할 때 늘 방언(통역)을 맨 나중에 위치시켰다(10b,28b,30b). 왜 갑자기 이 주제인가. 그러니까 가장 낮은 은사인 방언을 고린도교회가 너무 높이 평가한 것이고, 그래서 이제 제일 좋은 길’(13)을 소개하면서, 14장에 이르러서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며 궁극적으로 고린도교회가 추구해야 할 은사의 골(goal)이 무엇인가를 목회적(牧會的)으로 권면하려는 것이 [은사론](12-14)이 갖는, 동시에 31b절이 갖는 고린도전서에서의 위치가 아닌가 싶다.

 

 

부스러기 묵상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12)

 

다르다틀리다를 구별하며 살아야겠다.

한 몸과 여러 지체 사이의 관계는 서로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다. 각각의 지체들은 소중한 몸의 일부이며, 몸은 각각의 지체들로 이루어진 유기체다. 몸의 한 지체가 다른 한 지체를 향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시비를 거는 것은 옳지 않듯이, 한 은사가 다른 은사를 향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은사에 대한 오해이자 그것 자체가 성경적인 기준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오해한 은사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옳고 나와 다른 너는 틀렸다는 것만큼 무서운 독선은 없다. 자신의 은사는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는 무시하는 것, 동시에 내 은사는 열등하고 너의 은사는 탁월하다는 비교의식,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몸과 지체들의 관계를 오해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몸이 다양한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졌듯이 한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주께로부터 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다양성 안에서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돌아보는 일보다는 바른 은사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싶어 읽고 생각하며 끙끙거리다가 여기까지 왔다.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시기에 가장 적절한 은사를 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은사들이 은사 되게 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셨고 또 보여 주시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여 주시리라 확신한다.

오늘이라는 삶은 이렇듯 주께서 놓아주신 가장 좋은 길을 따라 가는 삶이기를 소망한다.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자. 내가 받은 은사가 진짜인가를 사랑에 비추어 보고, 사랑이 은사로 하여금 은사 되게 하도록 이미 내 앞에 활짝 열어 놓으신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장 좋은 길을 따라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영광스러운 지체로서의 나를 세워(tithemi, 18b,28a) 보도록 하자. 은사를 가슴에 품고 사랑로()를 따라 주님의 몸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은사는 삶으로 드러나고, 삶은 은사의 진정성을 밝히 보여준다. 은사는 삶을 먹고 자라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아멘이다.

 

 

제목 날짜
지식인 vs 사랑인(고전 8.1-13) 2020.06.13
인지/人智 vs 신지/神智(고전 1.18-31) 2020.06.03
이혼에 대한 교훈록(고전 7.10-24) 2020.06.11
이 공동체를 보라!(고전 16.1-12) 2020.06.29
음행(淫行) 클리닉(고전 5.1-13, 6.12-20) 2020.06.08
은사, 그 다양성과 통일성(고전 12.12-31) 2020.06.20
은사 클리닉 서론(고전 12.1-11) 2020.06.19
우상숭배의 시험을 피하라(고전 10.14-22). 2020.06.16
우리고백록2(고전 4.14-21) 2020.06.07
우리고백록1(고전 4.1-13) 2020.06.07
예언하기를 원하라!(고전 14.1-12) 2020.06.22
예언하기를 구하라!(고전 14.13-25) 2020.06.23
예배하기가 우선한다(고전 14.26-40). 2020.06.23
영원히 부를 부활송(고전 15.50-58) 2020.06.28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하여!(고전 9.24-27) 2020.06.15
신지신학.神智神學(고전 2.1-16) 2020.06.05
송사(訟事) 클리닉(고전 6.1-11) 2020.06.09
성만찬신학.聖晩餐神學(고전 11.17-34) 2020.06.18
성도(聖徒)입니까?(고전 1.1-9) 2020.06.01
사색당파.四色黨派(고전 1.10-17) 2020.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