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③ - 그 사역철학1(고후 4.1-6)

20200930(묵상)

   

 

 

사도직- 그 사역철학(1)

2 Cor. 4.1-6

  

   본문 관찰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낙심하지 아니하고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낙심하지 아니할 세 가지 이유 - 직 분

 

바울 흠집내기를 위한 어떤 사람’(3.1)의 추천서 파동은 일단락 되었다.

소위 사도권 논쟁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영광 안에서 사도들을 '새언약의 일군'(3.6a)으로 삼으셨으므로 율법의 영광(시대)은 이미 끝났다는, 이를 통해 율법주의자들의 경거망동(輕擧妄動)은 물론 하나님으로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1.1) 사실까지를 변호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시너지(synergy) 효과를 얻게 된다. 이로써 사도직의 기초(기원)와 탁월성이라는 성경적 입장이 고린도교회에게 전달된 셈이다.

하지만 바울은 좀 더 사도직에 대한 논의를 확장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도직을 받은 자들의 사역철학(4.1-5.10)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말함으로써 차제에 사도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이 부분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고”(1)와 역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16a)라는 말씀에 쌓여있고, 또 연결되어 있다.

계속되는 분파주의자들(2.5a,17a, 3.1)과의 소모전 때문에 사도(使徒)일지라도 낙심할 수 있다는, 그래서 사역철학을 낙심하지 말라!’는 키워드를 통해 드려다 봄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인가를(4.1-6), 우리에게 귀한 보배와 이를 이길 수 있는 견고한 믿음이 있음을(4.7-18), 그리고 우리에게는 장래의 소망이 있음을(5.1-10) 인하여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이 직분을 받은 대로 살아갈 것을 함께 나누고 있다.

   

 

우리는 영광의 직분을 맡은 사역자다(1-2,5-6).

 

바울은 자신의 심경 또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1).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았으니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에는 직분을 주신 분은 물론 그분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역을 해야 할 것까지가 포함되어 있다. ‘직분받기’(우리)에서 사역하기’(너희)까지를 품고 있는 바울의 마음에 깊이 공감할 수 있어 좋다.

그럼 낙심하지 않고서 그 다음을 어떻게 사역하겠다는 것인가. 여기에 바울의 사역철학이 녹아있다(2):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우리는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다가 우리 스스로를 떳떳하게 내세웁니다.”(표준새번역) 바울은 이제까지도 그리했고, 앞으로도 이런 자세로 고린도교회를 섬길 것이라 고백한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며, 이를 위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음을 말하는 바울에게서(5) -바울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린도교회의 종이 되는 것도 넉넉하게 받아들인다.- 오직 자기를 높이기 위해 제5복음서(‘내가복음이라는 정체불명의 다른 복음)를 주창하면서까지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한 분리주의자들의 간교함(2.5a, 3.1), 복음(말씀)의 순수성을 율법으로 왜곡시킨 혼합주의자들의 모습(2.17)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역 자세를 엿보게 된다.

역시 이번에도 바울에게서 놀라는 것은 이런 일련의 역풍 속에서도 단순히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쓰면서 함께 수렁으로 빠지는 공멸(共滅)이 아니라 -이는 사탄의 노림수다.- 탁월한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지도자로서의 안정감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고린도교회(너희)와 바울(우리) 모두가 다 함께 공생(共生)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게는 경각심을, 또한 율법과 비교할 수 없는 새언약의 영광과 탁월함을, 그리고 이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위로부터 난 사도의 소명과 사명을, 비록 배 안에 있어도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렇더라도 고린도교회가 낙심하지 아니하고”(1) 이런 소용돌이를 부흥과 성숙의 기회로 삼게 되는 것까지를 소망하고 있음을 보면서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큰 복을 받았고 또 받고 있는가를 새삼 주목하게 된다.

   

 

영적 전쟁(3-4)

 

바울은 이 모든 파도를 넉넉히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복음과 교회 안에 불어닥친 소용돌이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보는 통찰에 한 점의 허점도 없다. 고린도교회가 몸살을 앓는 것에 대한 바울의 통찰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영적으로 휘청거린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이다(3). 복음과 그것을 전하는 새언약의 일꾼’(사도)에게 문제가 없었다면 그럼 무엇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휘청거리는 것일까.

복음이 영광스럽게 펼쳐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망하는 자들’(3, 2.15)이 문제의 주범이다. 결국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영적 혼란에 빠지도록 한 멸망으로 가는 인본주의들(人本主義者, 2.5a,17, 3.1, 4.5)에게 복음이 가리운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영광의 복음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보는 바울, 그는 이미 복음 앞에 두 종류의 인생이 있음을 영적으로 통찰하고 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와 바울이 지금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靈的戰爭)의 실상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세상 신()’, 즉 사탄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이렇게 시각화한다: “이 세상의 신인 사탄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모습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기쁜 소식의 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5, 현대인의성경) 그렇다. 사탄은 교회 안(3, 2.15, 유대주의자들)과 밖(4, 믿지 아니한 자들) 모두를 자신의 밥이라 생각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바울은 어두움과 함께 일하는 저들에게 이렇듯 복음의 빛을 비춤으로써 저들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 버린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의 둘러싼 영적 전쟁의 실상을 밝히 보도록 함으로써 빙산의 일각처럼 은밀하게 진행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도록 촉구하는 바울의 지혜의 한 모습이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6)

 

사도의 직분을 받은 자들의 사역은 무엇인가.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4) 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에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5a)을 전파하는 것이 주께서 맡기신 사도직이고, 그것을 맡아 수행하는 자들이 고백하며 따라야 할 사역철학이다. 사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6b)신 그것을 새언약의 일꾼으로서 밝히 드러내는 것이지, 사도가 빛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걸 분명히 해 둔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의 빛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위로부터 온 복음(‘새언약’)이 아닌 자기 자신들로부터 만들어낸 것을 전파함으로써 결국 망하는 자들’(3a)로 추락하는 어떤 사람’(3.1)과의 근본적인 차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닌 세상의 것들을 적당하게 혼합해 버리면 나중의 몰골이 얼마나 추하고 불행한 것인가를 저들에게서 발견한다.

이런 치열한 영적전쟁(靈的戰爭)의 현장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1a) 살 수 있는 이유를 바울에게서 배운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직분이 있다.”는 사역철학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씽씽거리며 살 수 있는 바울이 부럽다. 때문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5b)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었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전개되어지는 파도 앞에서도 이처럼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언행(言行)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관리에 있어서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처럼 밝히 드러낼 수 있기까지 뼈를 깎는 영적 산고(産苦)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을 것을 생각하니 바울의 파도타기가 어떠했을 것인가 조금은 짐작이 간다.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님 안에 있으면서 낙심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 아닐까. 나는 바울처럼 이런 영적전쟁(靈的戰爭, 3-4)을 언제쯤에나 즐기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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