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선언(고전 9.1-18)

20200614a(묵상)

 

 

 

고린도선언

1 Cor. 9.1-18

 

      본문 관찰

 

   내가 사도가 아니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그러나’(12b)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15a)

   내 상이 내게 있는 권은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권리포기(權利抛棄)

 

   권리1(4,5,6)

예화(병정, 포도, 양 떼_7)

권리2(9_25.4, 13_6.16,26, 14_10.10)

   → 포기(12b,15,18)

 

남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바울의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다.

8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주면서 자기 권리와 자유에 관한 지식을 사용했던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은 고린도교회 앞에 권리를 포기하는 선언을 써 내려가고 있다. 사실 그는 이 고린도선언이전에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바울은 8장의 모델로서, 즉 고기를 먹어도 되는 자유함은 약한 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앞설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자유에 대한 모범으로서의 자신을 간증한다. 그러므로 8.1-11.1절에서 다루는 우상 제물의 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9장은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바울의 사도성 주장(1-6)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비판하는 자들’(3)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하고 무시하면서, 그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1-2).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분파를 가져온 직접적인 하나의 이유였다(1.11-12). 바로 그들에게, 즉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지식을 앞세운 나머지 결국 그렇지 못한 자들(약한 자들)을 사랑하지 못하였던 자들에게 변명’(변론, 3) 형식을 취해 자신의 삶을 간증한다.

바울은 비록 자신의 사도권이 흔들리는 위기가 있을지라도(1-3)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살았고, 또 사역을 감당해 왔다. 이것은 그의 일관된 삶이요 사역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을 반대(비난)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점은 좀 충격스럽다(1-3).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시비하고, 이 문제의 연장으로써 사도가 아닌 자가 어찌 사례비를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다면 바울 역시 떠돌이 철학자들처럼 자기가 말하는 것의 대가를 취하며 살아가는 그런 정도의 사람에 불과한 자가 아니냐는 식의 비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들이다.

바울은 지금 자신에게 이런 비난의 칼을 뽑은 자들(그들은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고린도교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들이다.)의 실상을 조목조목 드러내면서, 정작 과연 누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인가를 밝혀내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그가 사도성을 주장하고, 동시에 사도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간증마저도 자랑이 아닌, 진실로 그리스도인다움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려는 몸부림의 연장인 셈이다.

 

 

바울의 사도적 권리(7-18)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12b)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15a)

   “그런즉 내 상이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18)

 

바울은 교회가 복음 전하는 자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18.3). 그러나 전도자(사역자)에 대한 교회의 책임에 대해 바울은 분명한 원칙을 말한다. 사실 여기서 제시한 것들은 이미 고린도교회가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13).

일반적인 관례(7)에 이어 모세의 율법(13, 6.16,26, 25.4)을 인용한다. 이처럼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의 육적인 것을 제공해야 한다(11):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 무엇보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14). 주님은 12제자를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것을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10.10)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12). 자신에게도 육신의 것을 제공해 달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오해가 있었다.- 자신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15).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자비량(自備糧)으로 사역하는 것이 왜 자랑이 되는가. 위에서는 사례를 받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받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럼 사례를 받고 일하는 바울 이외의 모든 다른 사역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이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현대의 어떤 사역자들처럼 받지 않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자랑은 훨씬 다른데 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만나게 된 배고픔과 핍박들, 고통스러운 환경을 자랑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매우 고도의 역설을 사용한다.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월급을 받는 것과 같은 그런 보상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16-17). 이것이 사역자들의 마음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권리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례를 받지 않고 일한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수준 이하의 자기 포기가 아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믿음, 그리고 오히려 자기의 자랑이 복음 가운데 받는 고난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로 감추는 놀라운 자랑 포기인 셈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6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농촌 교회 교역자들은 교회에서 드리는 사례로는 생활이 되지 못했다. 내 기억에 당시에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안다.- 달마다 쌀과 보리 몇 말, 그리고 겨울에 김장해 드리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다같이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 한 때이긴 했지만 고향 교회 목사님도 염소를 키우셨고, 그 젖을 짜 새벽이면 배달을 다니시며 생계를 꾸리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교회 1세대 목사님들은 다 바울처럼 반() 자비량, 혹은 완전 자비량으로 생활하셨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큰 교회도 없었고, 총회에서 보조하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목사님들은 나는 자비량으로 목회합니다!”라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것이 자랑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아서다. 복음을 위해 일하는 것이 무엇보다 그들의 감사요 감격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도 나는 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시는 분들이 있나 본데,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얼마를 드리는데 .”,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목사를 봉급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사례를 받지 않는다는 양반들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어도 다 생활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주머니(출판 인세 등)가 있는 분들이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한번 말이 나왔으니까 더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12제자들과 함께 3년 이상을 동거동락(同居同樂)하셨는데 어떻게 생활하셨을까. 왜 재정을 맡은 제자가 별도로 있었을까. 능력 많으신 분이니까 그냥 식사 때가 되면 음식 앞으로!” 그러면 음식이 척하고 준비되고 그랬을까. 주님도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셔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줄 안다. 그런데 왜 요즘 일부에서는 목회자가 자비량 하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여기려 드는지 모르겠다.

성경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당시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생활비를 부담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는데 나는 교역자들처럼 사례도 받지 않고도 그들처럼 일한다. 나는 교회의 사례를 받지 않는다. 나는 교회 사례를 올려라 내려라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와 같은 이런 얘기들은 무엇인가. 바울 말로 하면 다 자기 자랑이다.

만약 우리가 자비량으로 살아야 한다면 일주일 내내 직장(직업)을 갖고 일하고, 주일에만 교회에 나와서 목양(牧羊)해야 한다. 그러면 교회가 건강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죠. 그러나 그러는 동안 교회는 잡초가 자라고, 양들은 다 병들고 말 것이다. 현대교회는 초대교회처럼 가정교회가 아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지도자들은 보라.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세례요한이나 베드로가 직업을 가지고 목회(사역)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매우 특수한 사역자다. 그는 한 곳에 정착하여 수고하지 않았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살았다. 그랬기에 그에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어떤 전문직이 필요했다. 바울의 경우가 일반화될 수 없다. 그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역자다.

바울이 성경과 주님의 명령을 넘어서면서까지 자비량을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특별히 고린도교회에서만큼은 사례비를 받지 않고 사역을 했다. 그것은 사도성을 의심하는 일부 성도들이 사도도 아니면서 교회의 녹을 먹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그리고 바울도 돈을 밝히는 어쩔 수 없는 삯꾼이라는 비난하는 자들(3)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오해들이 오히려 복음의 방해꺼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그는 자비량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다.

[고린도선언]은 바울이 얼마나 복음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자신의 그림자까지라도 복음의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목회자였는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피해야 할 죄이지만, 교회가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부담해야 하는가를 시시비비하는 것도 반드시 피해야 할 죄다. 사탄은 이런 민감한 부분들을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교회의 권위와 목회자의 지도력을 우습게 만드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해 왔다. 하지만 사탄이 더 이상 이런 유치한 게임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가지고 노는 일에 희생양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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