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한 교훈록(고전 7.1-9)

20200611(묵상)

 

 

 

결혼에 대한 교훈록

1 Cor. 7.1-9

  

   본문 관찰

 

   결혼과 독신에 대하여(1-7)

   독신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8-9)

 

 

결혼(結婚) 클리닉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4-6)

 

고린도 교인들이 결혼과 관련한 질문을 바울에게 했다(1).

아마도 음행에 대한 여러 오해들이 결혼에 대해서도 편향된 생각을 가지게 한 모양이다(5.10-13).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회신이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결혼과 독신에 대한 상반된 의견들이 분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이 둘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다. 그러므로 이 둘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때문에 성경이 결혼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듣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준이어서다.

 

 

결혼과 독신에 대하여(1-7)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5b)

 

결혼은 지극히 정상적인 순리다(1-4, 19.4-6). 특히 결혼은 상대방을 지배(주장)하는 관계가 아니라, 반대로 배우자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건강한 결혼(가정)으로 가는 길이다(3-4).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의무를 다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배우자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배우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씀, 참으로 깊이 마음판에 각인되는 말씀이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만을 주장하는 이기적인 언행이다. 하나님은 남편만을 위해 아내를 주시지 않았으며, 반대로 아내만을 위해 남편을 주시지 않았다. 나의 욕망과 욕심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배우자를 구하고 결혼을 이용한다면 이는 결혼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기만하는 행위다. 때문에 이런 결혼은 행복할 수 없고, 하나님께 온전히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서로 분방하지 말라!”(“서로 상대방을 빼앗지 말라!”, 5a), 즉 배우자의 요구를 물리치지 말라는 메시지가 갖는 존엄함이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그것도 합의상 얼마 동안만 허락될 정도로 부부는 한몸공동체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5b). 이처럼 기도에 전념하다가 일시적으로 하는 경우마저도 얼마 동안만 허용되는 것은 결혼과 관련하여 성경이 얼마만큼 배우자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가를 알도록 해 준다.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5b)

-사탄이 너희를 시험(유혹)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5c)

-나와 같기를 그러나 각각 은사가 있으니(7)

 

 

독신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8-9)

 

나와 같이 (그러나)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8b-9a)

 

독신자들과 과부들에게는 할 수 있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8-9). 이것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말씀이다. 그 이유는 다른 서신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정욕을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라고 명한다. 역시 절제’(5,9)는 어떤 경우든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독신생활을 말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먼저, 7절에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라는 말씀에게 보듯이 바울은 결혼하는 것 그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신의 은사를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곧 임박한 환란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26)는 말씀처럼 바울은 주님이 곧 오시리라 말씀한대로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때문에 결혼보다는 곧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우선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를 만든 것 같다.

다른 하나는 35절이다: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주님을 섬기는데 가정이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섬기는 일을 위해 독신이 유익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의 말이다(이 주제는 7장 후반에서 좀 더 살펴볼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큰아이가 6살 때 쓴 글 가운데 앞뒤를 빼고 몇 부분만 옮겨본다. 가족, 가정, 부모, 자식, 결혼 등 이런저런 주제가 연결된 묵상 앞에 서 본다.

 

가족을 위하여(20040512-14)

녀석들은 내가 좋은 아빠가 되기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훌쩍 시간이 지난 후에 녀석들의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녀석들 역시 지금이라는 시간이 쌓여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 모든 것을 아내에게 다 맡겨 놓고, 조금 더 크면 그것을 다시 선생님들에게 맡겨 놓고, 내 자식들만큼은 잘 자라주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여전히 신뢰하면서... 그러다가 일이 꽝 터지면 보통의 경우들처럼 후회하고, 또 아파하고... 이런 거야 다 내 가책을 좀 묽게 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런다고 이미 잘못된 인생도(人生圖)가 갑자기 작품이 될 리는 만무하고.

아무도 삶을 연습해 보고 다시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럼 지금이 가장 아름다워야 하고, 최선과 최상으로 빚어져야 한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은 마지막에 웃어야 한다지만 그러나 오늘도 웃으며 살고 싶다. 나나 녀석들이나 우리 모두의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때문에 오늘은 다르게 살고 싶고, 그만큼 오늘이라는 그림을 행복스럽게 색칠하며 지내고 싶다. 너무 감상적이거나, 아직도 십대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몸부림일까?

동물의 왕국을 보면 어미들은 새끼들을 잘 보살핀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정글에서 홀로 생존할 수 있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다가 혼자 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분가(分家)한다. 영혼이 없는 짐승들은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데 정글의 법칙에 늘 순응한다. 헌데 사람은 좀 글쎄다. 자식이 자라 성인(成人)이 되었는데도 성인아이처럼 품에 끼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잘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 아무리 생각해도 잘 한 일이다. 이왕 하려면 정말 잘하고 싶다. 스스로 자신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홀로서기를 축복해 줘야겠다. 우리 주님의 달란트 비유가 생각난다(25.14-30). 이렇듯 당신의 것을 내게 잠시 맡기신 주님은 언제가 그것을 다시 찾으실 것이다(25.19). 그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뵙고 싶다. 나는 오래 전부터 자식은 주님이 내게 맡기신 달란트라는 생각을 해 왔다. 자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된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내게 주님이 부모이듯이 녀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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