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淫行) 클리닉(고전 5.1-13, 6.12-20)

20200608,10(묵상)

    

 

 

음행(淫行) 클리닉

1 Cor. 5.1-13, 6.12-20

 

 

   본문 관찰

 

   교회 안의 음행(5.1-13)

     심지어 음행이 있다

     그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옮지 아니하도다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과 몸(6.12-20)

 

 

음행해법(淫行解法)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5.6a)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4.21a)는 이유, 있다.

이방인보다 못하기 때문이다(5.1).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 지혜’(말의 지혜) 때문이었다(1-4). 바울은 여기서 세상 지혜에 대한 자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음행’(5.1-13, 6.13-20) 문제를 다룸으로써 밝히 드러낸다(5.6a).

이로써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거룩성과 성도의 신분에서, 그리고 성도의 수준에서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1.2a)- 멀어져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분쟁 클리닉(1-4)과 교회 클리닉(5-16)은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의 음행(5.1-13)

 

간음하지 말라.”(20.14)

너는 아버지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아버지의 하체니라.”(18.8)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7.20)

 

고린도교회의 음행은 심지어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5.1),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런 짓을 행한 자를 교회 안에 용납하고 있음이며(5.2b),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히려 교만하여”(5.2a)진 상태 그대로, 그러니까 말의 지혜로 분쟁 중()인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 세상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무력하게 하더니, 그렇게 지혜 있다 하며 분파주의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도 모자라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5.6a)- 이제는 음행까지 서슴지 않는 교회로 추락하고 있다. 이들의 지혜는 이런 상태를 판단할, 그래서 그것을 넘어설 진정한 지혜(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클리닉은 놀랍다(유월절과 누룩 예화). 바울은 여기서 묵은 누룩을 집안에서 제하였던 유월절의 법칙을 -이것이 유월절다움의 한 표식(sign)이었다.- 예로 들어 설명한다(5.6-8, 12.15,19-20, 13.7): “7일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여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하게 하라.”(13.7) 순결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자(5:7a,8b, 성도-1:2, 하나님의 지혜)와 떡으로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5.6b, 음행), 묵은 누룩’(5.7a)이자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비행과 악습의 누룩, 5.8a)이라는 음행을 버릴 것을 말한다.

이렇듯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이 말의 지혜’(세상 지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고린도교회를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임을 변함없이 확신하고 있다. 무릇 형제라 일컫는 자’(5.11a)묵은 누룩의 부스러기들(음행자, 탐욕자, 우상숭배자, 모욕하는 자, 술주정뱅이, 약탈자, 5.11)온 덩어리’(교회)에 퍼지게 한다면 이런 자들은 바울이 이미 판단’(이미 심판, 5.3)했고 또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5.5a)듯이 고린도교회도 역시 이런 자들과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5.11b) 명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세상의 음행하는 자들, 5.9-10)은 하나님이 판단(심판)하실 것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안에 있는 이들, 이 악한 사람)은 고린도교회가 판단(심판)해야 할 사람들이다(5.12-13a). 교회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심판하는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5.13b) 하지만 이는 외인들로부터의 도피하는 방식이 아닌(5.9-10), 이런 불의하고 심판 받아 마땅한 세상 안에서 저들과 다르게 사는 자로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5.11).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정체성(identity)이다.

적은 누룩’(한 음행하는 자)온 덩어리’(교회 공동체)에 퍼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본다. 세상은 죄 아래 있는 것이지만(5.9-10) 그러나 교회(‘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 11a)는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롭게 부름 받은 새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음행의 문제를 통해 교회까지를 클리닉하고 있는 바울의 목회적 통찰이 눈부시다.

 

 

음행에 대한 경고(6.12-20)

 

    []

    13 ‘은 음란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하며 있으며 주는 을 위해 계신다.

    15 ‘은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이므로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없다.

    18 음행하는 자는 자기 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은 성령의 전이지 너희 것이 아니다.

    20 그런즉 너희 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상교회의 축소판이다. ‘아직거룩하지 못한 모습으로 가득한 교회, 그럼에도 이미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이며, 따라서 그 정체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회, 바로 이것이 지상교회다(1.2,30).

한편 바울은 음행에서 송사로(5.1-11 6.1-11), 송사에서 다시 음행으로(6.1-11 12-20) 주제를 전환한다. 비슷한 문제를 왜 이처럼 떨어뜨려 놨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싶다. 한편 자세히 보면 612-20절의 주제어는 이다. 5장에서는 비록 그가 형제(성도)일지라도 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를 용납하지 말 것에 대해서, 그리고 6장에서는 성도의 몸은 음행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한 성령의 전(殿)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할 사명에 대해서 교훈한다.

그럼 왜 갑자기 몸인가. 아마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이단 가운데 하나였던 영지주의(Gnosticism)의 그릇된 사상으로부터 고린도교회를 지켜야 할 강렬한 요구를 읽었고, 이참에 새롭게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음행은 교회 안에서까지 이미 세상 지혜인 노스틱주의와 간음 중()이었기 때문이다. 말의 지혜는 결국 십자가의 도와 은혜를 떠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다른 복음’(1.6-10)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의 몸은 그것이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구원의 현존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만 한다(12.1).

영지주의는 인간이 육체로는 죄를 범해도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대로 타락했고, 온갖 죄악을 저질렀다. 이들은 영만 깨끗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철저한 이원론적 사고에 젖어 있는 그야말로 독버섯 같은 존재들이다. 바울은 지금 이러한 이단자들의 거짓(위장)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까지 스며들어 왔음을 알았고, 동시에 이러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붓을 든 것 같다.

그렇다면 성도가 음행(淫行)을 초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와 합하여 창가와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6.15-16). 이것은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인데(6.18), 이로써 성령의 전으로서의 거룩한 몸을 잃어버리게 되고(6.19), 더 이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 되지 못하게 되고 만다(6.20).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몸이요(6.15), 성령의 전으로서의 몸이며(6.19),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몸이라는(6.20), 이처럼 성도의 몸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이처럼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다시 육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만큼 말씀과 분리된 몸일 수 없다는 보다 깊은 선언이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이기에 보배만큼 질그릇도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6.12a)는 자유의 법칙이 급기야 오해되더니 음행까지도 가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까지 가 버렸다. 이는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식물을 위하여 있”(6.13a)다는, 즉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성욕(性慾) 역시 몸을 위하여 있어야 하는 자연적 필요라는 세상의 지혜의 논리를 그만 거룩한 성도의 몸 안에 담아버린 셈이다. 이것은 영적 방종이요, 자유를 빙자하여 본능의 노예가 되는 것마저 상관없다는 그야말로 영육을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우상숭배다.

  

 

부스러기 묵상

 

    “그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5.2a)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8.12)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근원).

어떤 일의 결과를 놓고 볼 때 교만하다가 아니라 교만하기 때문에 그것이 부정직하고 악한 열매로 나타난다. 이게 고린도교회의 현상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뜻을 이미(5.9a)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성도(聖徒)의 본분을 이탈하여 세상()의 지혜의 노예가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분쟁(파벌)은 물론 보이지 않는 음행까지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영육(靈肉)이 다 병들어 있다.

이런 유무형의 헛된 상태가 교만으로 나타난 것이다(5.2a).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인냥 자랑하고(4.7b, 5.6a, 6.5), 바울 정도는 두려워하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고(4.18), 급기야 음행하는 것과 그런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용납할 만큼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상태로까지 무너져 버렸다.

교회 안에 어디까지가 함께 더불어 공존해야 할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대목이다. 과연 어느 선까지 섬기고, 기다려 주고, 참고, 가르치고,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내편에서 먼저 결론을 갖지 않아야 하나? 주님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까지도 당신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셨는데 나는 나의 옳음과 선() 때문에 형제’(성도, 5.11a)를 정죄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싶어 난감하다.

하지만 바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교회, 5.6-8)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또한 믿지 않는 자들도 사귀며 살아야 한다면(5.10), 믿다가 그만 죄 중에 있는 자를 내어 쫓으라!”(5.13)시니 자꾸만 복잡해진다. 바로 이 부분이 바울이 말하는 [출교+?=교회의 권위](5.5)의 의미가 아닌가 싶다.

한편 교만한 자는 음행한 자가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교회 안에 용납하는 너희다(5.2). 바울은 이 주제를 다루면서 먼저 음행자(淫行者)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이런 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5), 그리고 한 사람의 성도로서 자기 몸을 어떤 시각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6.12-20). 물론 음행자(누가, 그 일 행한 다, 이런 자, 이 악한 사람, 5.1,2,5,13)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지만(5.5) 무엇보다 이런 자들을 용납한 너희(고린도교회)가 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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