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백록2(고전 4.14-21)

20200607b(묵상)

 

     

 

우리고백록(2)

1 Cor. 4.14-21

     
   

   본문 관찰

 

   아비의 마음으로(14-17)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부록_예고된 경고(18-21)

    어떤 이들은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부자(父子)처럼!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15b)

 

   4장이라는 우리고백록은 바울행전의 한 토막이다.

그의 고백은 지혜타령의 꼭두각시가 되어 분쟁이나 일삼는 너희의 자랑과는 분명 다르다. 사실 고린도교회는 말의 지혜에 기초해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육신에 속한 자의 도토리 키재기 놀이터와 같았다. 이에 반해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상처난 교회를 치료하고 회복하려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바로 이 시간까지”(11a) 살아왔고, 이제 그런 그가 고린도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저들을 새롭게 하는 것을 위해 주 안에서 자랑하라!”(1.31)는 말씀에 입각하여 신령한 자의 간증을 토해 낸다. 그러니 그의 고백에는 자기 자랑과 같은 공치사(空致辭)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아비의 마음으로(14-17)

 

바울(우리)이 지금 진행 중인 너희와 우리의 구별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논리 앞에 과연 고린도교회(너희)가 보일 반응은 어떨까. 아마도 4장의 분위기는 이것을 염두에 둔 목회적 접근이 아닌가 싶다. 이제껏 깊은 이야기를 해왔고, 앞으로도 매와 사랑’(21) 중 결국은 매를 드는 쪽으로 이어갈 분위기인지라(5) 일단 호흡을 고르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이처럼 너희에게 나아가지만 사실 자신의 속마음만큼은 어떤 동기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일에 본을 보였으니 이는 ”(6)

   “이것을 쓰는 것이 ”(14)

 

어찌 보면 바울은 저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러질 수 있거나 강한 바람만이 전부는 아니며 때로는 휠 수 있는 부드러움의 여유나 따뜻함이 옷을 벗게 하고, 또 상대방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완급(강약)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바울의 지도력이 빛난다 아니할 수 없다(6,14). 강한 아버지 앞에서는 순간 변하지만 자애로운 어머니를 통해서는 평생을 두고 닮아가면서 변하여 새롭게 되는 법이니까.

잠시 폭풍우(7-13)가 지나자, 바울은 다시 고린도교회를 가슴에 품고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여 하는 것이라.”(14) 은혜로 받은 성도다움을 팔아 세상의 지혜타령을 사서 분쟁하기에 열중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랑하는 자녀를 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분쟁 클리닉](1-4)을 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스승이 1만 명이라 하더라도 아비는 많을 수 없다(15a). 그것은 바울이 복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낳음으로써 저들이 영적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15b). 이처럼 가족언어를 통해 관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아마 누가 보아도 스승에 불과한 자들을 아비로 내세웠고, 그것 때문에 끊임없이 분쟁(논쟁)이 가속화되었겠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그러기 때문에라도 자식은 아비를 닮아야만 한다(16):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한편 바울은 이런 부자(父子) 관계가 지속되어지기를 위해 디모데를 파송하였다(17). 네 조각으로도 모자라 오색당파(五色黨派)를 만들려고 고린도교회의 목회자로 디모데를 보낸 것이 아니다. 바울복음의 계승만이 분열된 교회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비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보낸 아들이라면 그가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너희를 목회해 주지 않겠느냐는, 그렇다면 여기에는 바울과 디모데의 부자(父子)처럼 너희와 디모데가 그렇게 세워져가기를 소망하는 바울의 부성(父性)이 알알이 박혀있는 처방전(클리닉)인 셈이다.

   

 

부록_예고된 경고(18-21)

 

    바울의 고린도 전도(18:1-17)

      → 바울의 첫 편지(5:9a, 잃어버린 서신)

        → 디모데 파송(17)

          → 고린도전서

            → 예고된 재방문(19)

            → 아볼로 재파송 예고(16:12)

            → 고린도후서

 

바울은 직접, 혹은 여러 채널을 통해 고린도와의 만남을 이어왔다. 그 와중에 분쟁은 이렇듯 교만으로까지 빠르게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6b,18,19; 참조. 5.2). 교만은 마침내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사실처럼 꾸몄고(18), 아니면 분쟁 중에 고린도교회의 주도권을 바울파가 장악했거나, 이들이 이처럼 확신할 만큼 모두가 다 아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상황을 앞세우지 않고 주께서 허락하신다면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이 모든 일의 주도권을 늘 주님께 두고 언행한다(19a). 이는 번지르르한 말, 그것도 교만한 자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 많이 양보해서 말은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그 말의 성취는 저들의 분쟁주의자(교만한 자)들의 기대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흔들 수 없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19b).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 너희의 말들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그럴듯했을지는 모르나 우리의 능력은 너희와 온 교회가 다 익히 아는 복음의 현장에서 나타난 능력이었기 때문이다(6-14). 이 하나님의 나라의 역설의 능력을 말의 지혜를 따라 춤추는 자들이 어찌 알리요!

 

 

부스러기 묵상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15a)

 

   21절은 분쟁 클리닉(1-4)과 교회 클리닉(5- )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다.

어쩌면 바울은 두 가지 모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있기 보다는 앞으로 있을 만남을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져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로 나아가기로 결정한 것 아닌가 싶다. 아비가 그 자녀가 그릇 가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 알면서 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된 마음이 아니다. 바울은 먼저 있어야 할 매를 포기한다면 어쩌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쓸 기회가 영원히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복음으로 낳은 영적 자녀들을 강하게 훈련하는 쪽을 택한다.

동물원에서는 정글에서 생존할 동물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안에서 던져주는 먹이나 먹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만 생존이 가능할 뿐이다. 지금 어린아이일 때 버릇을 바르게 고쳐주지 않으면 이 못난 습관이 평생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너희와 우리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사이라는 것만 둘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할 수 있다면, 이왕 손에 든 매를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스승은 1만이 넘어나지만 아비는 많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다(15a). 나를 4장 앞에 세워 놓고 묵상 중이다. 목회자로서 나는 성도들에게 스승인가, 아니면 영적(靈的) 아비인가? 한 번의 주저함 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당당하게 나는 너에게 아비다!”는 고백을 해 낼 수 있는 바울이 부럽고, 동시에 정답은 알지만 정답처럼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를 어쩔 수 없이 바라만 본다.

아비는 자녀가 못나고 철없을 때 더 애정과 눈빛이 가는 법이다. 쉽게 단정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시작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며, 자녀가 부족한 만큼 부모의 가슴은 시리고 아프다. 탕자의 아버지는 언제나 변함없이 아들답지 않은 아들이지만 한시도 그를 잊지 않았다. 바울이 그랬듯이 나 또한 나와 교회를 바울처럼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유지하고, 성숙(발전)시키며, 회복해 가는 목회이기를 기도한다.

바울의 고백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바로 이 시간까지 후욕(詬辱)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되었도다!”(11-13) 이것이 희망을 땅의 지혜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의 삶으로 드러내는 복음이 아닐까.

요 며칠 정말 을 잘 다스리고 절제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뭔가를 말한다는 것만이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정화하고서, 좀 더 앞뒤를 생각하고서, 내 입장만 수도꼭지 열듯 토해 내고서 끝나면 닫는 식의 내 맘대로가 아닌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그런 언어생활에 대해서. 바울은 말이 행동을 이상하게 만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행동이 말을 추하게 만들지도 않는, 그야말로 언행(言行)에 있어 균형 잡힌 삶을 살았다. 그의 연습생이라도 좋으니 당분간 우리곁에 머물러 있어야할 것 같다. 고린도전서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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