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백록1(고전 4.1-13)

20200607a(묵상)

  

 

 

우리고백록(1)

1 Cor. 4.1-13

         

 

   본문 관찰

 

   우리 - 하나님의 일군에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본 -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너희 -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라

     

그리스도의 사도

 

이 일에’(6)에 대한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 된다.

물론 분쟁 클리닉(1-4)에 이어지는 교회 클리닉(5- )에서도 이 일은 여전히 평행을 이루면서 흘러간다(5.6a, 6.5, 11.17-19). 이것은 고린도전서 전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찰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그만큼 이 일’(말의 지혜와 분쟁이 몰고 온 고린도교회의 어린아이 언행들)이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한편 4장의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불필요한 여러 오해들에 -아마 유감스럽게도 바울파가 아닌 자들의 교만한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지금 자신을 따르는 자들 편에서 저들을 책하는 것은 아니다(1,6b,18-19).- 대해서 적절한 대답을 한다. 동시에 앞으로 계속해서 이야기할 주제들을 다룰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속마음을 토해냄으로써 고린도교회와의 거리를 부자(父子) 관계로 밀착시킨다.

  

 

우리 이야기(1-5)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4b)

 

바울은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이해의 시각을 새롭게 하기를 요구하는데, 그 분위기는 놀라우리만큼 당당하다. 너희가 임의대로 붙여주었으나 참으로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는 [바울파]라는 부끄러운 이름은 이제 그만 다른 파()보다 먼저 해체하고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1)로 여기게 하라 명하는 것에서 그렇다.

여기에는 각 파벌끼리 서로 자신들이 더 지혜롭다거나 우월하다면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밟으면서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소모전이 끝나기를 기대하는 바울의 간절한 기대가 들어있기도 하다. 이런 불편한 오해 속에서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충성된 사람이 되는 것 밖에 다른 뜻이 없음 또한 분명히 한다(2).

한편 바울은 너희가 나를 판단(비판)할 권리는 없고 -“주께서 오시기까지”(5a).- 오직 자신은 심판하실 분은 주님이심을 선명하게 선언한다(4). 그는 이런 헛된 입방아(쫑알거림)가 교회에 얼마만큼이나 유해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 단적인 예(case)가 바로 고린도교회다. 이것은 감사꺼리’(1.4-9)[분쟁타령](1.10- )으로 바꿔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1.30a)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1.30a)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지혜에 의지하여 교회를 분쟁케 하는 육신에 속한 자로 성장이 멈춰버린 어린아이(성인아이, 3:1-3)로 살아가는 것도 부족해서, 고작 한다는 게 우리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으니 .

그럼에도 바울은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비밀에 충성된 자로 초지일관(初志一貫)하겠다 고백한다. 바울의 자기 절제력(통제력, 오래 참음=사랑, 13.4a)이 사역자인 내 가슴에로 옮겨왔으면 좋겠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얼굴빛부터 달라지는 좁쌀스러움으로야 어찌 고린도교회와 같은 현대목회에서 승리할 수 있으랴!

   

 

우리 본(pattern, 6-13)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본보기로 들었다.

     그것은 너희가 기록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한 쪽은 편들고 다른 쪽은 맞섬으로써

     교만하여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6, 표준 신약전서)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자랑하느뇨?”(7b)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을 본(pattern)으로 제시할 만큼 자신감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뽐내려는 자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고린도교회가 자신에게 배우기를, 그래서 저희끼리와 저희-우리가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는 의도에서다(6). 자기 파(, 1.12)가 아니면 서로 맞서 대적하여 하나님의 교회 안에 조차 세상처럼 사람에게 줄을 서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도의 애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다시금 자랑말기에 대한 주제가 후렴구처럼 반복되면서 어디에서 비롯된 자랑인가를 깨닫게 만든다(7, 1.29,31).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들의 분위기가 좀 심상찮아 보인다. 꾸짖는 것 같기도 하고, 이실직고(以實直告)를 촉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그런데 유심히 읽어보면 지금껏 이야기해 온 바처럼 모든 면에 함량미달인 너희(어린아이) vs 우리(심고 물 주며 오직 주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그리스도의 일꾼) 우리 사이의 극적인 대조를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극대화시킨다. 이는 다름 아닌 저희의 실상에 대한 신랄한 풍자에 가까운 조소다. 피할 수만 있다면 이처럼 비교하지 않고 싶은, 그만큼 진실로 깨달으라는 의미에서의 말하자면 거룩한 야유다.

 

    [너희타령]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8a)

    지혜롭고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10)

      vs

    [우리행전]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11)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詬辱)을 당한즉 핍박을 당한즉 비방을 당한즉(12-13a)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13)

      (후렴)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11-13)

 

이와같이 참담한 취급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고백록]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온 바울행전(9,11-13), 한편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랑꺼리로 가득찬 자들이 만들어낸 너희타령(8a,10)이 이처럼 극적으로 대조될 수 있을까. 비록 너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공통분모를 공유한 너희라면(2.10-13 3.16), 즉 너희도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다면 바로 지금 이 시간까지 진행중인 [우리행전]을 똑똑하게 보면서도 여전히 [너희타령]이나 하고 있을 것이냐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처럼 피를 토하는 절규를 듣고 고린도교회가 보였을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정말이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 놈이 번다.”는 옛말처럼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다. 순전한 복음의 빛을 따라 자랑목록이 가득했던 교회가 이처럼 말(세상)의 지혜에 편승하여 시기와 분쟁을 법 먹듯이 하더니, 급기야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의 모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사실이다.

  

 

부스러기 묵상

 

    “우리에게서 배워 ”(6b)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

 

너희를 향한 바울의 노래가 슬프기만 하다.

하지만 어찌 들으면 이 노래는 사랑하기에 부르는 눈물로 쓴 애가(愛歌)이기도 하다. 그만큼 바울의 마음은 복잡하고 미묘했을 것 같다. 그의 노래를 결코 포기와 절망에 찬 탄식의 비가(悲歌)로 들을 수 없는 것은 이를 통해 바울이 듣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노래가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들려지는 것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이 희망의 여백이 있었기에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지금까지 ”(11-13)라는 후렴구를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부를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후렴의 멜로디(“후욕(詬辱)을 당한즉 핍박을 당한즉 비방을 당한즉”, 12-13a) 바로 앞의 음표들이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당한즉 축복하고 당한즉 참고 당한즉 권면하니”(12-13a) 후렴구의 두 음표가 합력하여 이룬 선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의 삶이다.

갑자기 바울에 비하면 초라하디 초라한 나의 모습,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우리고백록]의 심오한 멜로디, 아무나 모방할 수 없고 누구도 연주할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의 일꾼만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드릴 수 있는 우리행전이다. 바울은 자신의 온 몸으로 이를 주님의 교회 앞에 드린다. 그러나 자신은 당한즉으로 이어지는 삶의 리듬 앞에 서 있어야만 한다. 비록 이것이 일꾼다움을 끊임없이 위협한다 할지라도 그는 주님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변한 것은 고린도교회(너희)이지 바울이 아니다. 바울은 처음 고린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울 때나 바로 이 시간까지”(11a)나 오직 일편단심(一片丹心) 한결같은 멜로디로 자신의 전부를 다 드렸다. 너희스럽지 않아도 우리행전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이러쿵저러쿵 분쟁이나 하며 내편 네편으로 교회를 사색(四色黨派, 1.12)으로 세상과 방불하게 만들어버렸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 의()를 내세워 저들을 비난하는 식의 분노의 질주 같은 것은 더더욱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바울이고 싶다. 그렇다면 너희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네 탓이라고 말하기는 쉬어도 내 몫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욱 밑 빠진 독에 물 붙기처럼 보이는 일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세상계산법에는 눈을 감았고 하나님의 공식만을 생각했고, 거기에 자신을 그대로 대입시켰다. 그랬더니 오늘 [우리고백록]을 주님의 교회에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나다. 주님도 어린아이인 너희(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주님의 일꾼인 바울도 답지 못한 고린도교회(너희)를 끝까지 주님의 마음으로 품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주님의 정신이고 복음이 아닌가. 이처럼 개차반스러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주님의 교회임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았으면 싶다. 주님의 마음으로 교회를 보고, 바울의 심정으로 교회를 품을 수 있기를, 그래야만 목사 구실 제대로 할 것 같다는 생각, 온종일 내 심장처럼 내 안에서 쿵쿵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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