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희망이다(고전 3.10-23).

2020606(묵상)

 

 

   

교회가 희망이다.

1 Cor. 3.10-23

   

 

   본문 관찰

 

   바울 - 지혜로운 건축자

   예수 그리스도 - (기초)

   너희 - 하나님의 성전

 

  

지혜로운 건축자

 

    “나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대로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집을 세운다.

     그러나 각각 어떻게 세울지 조심하여야 한다.”(10, 표준 신약전서)

 

바울은 자신을 건축가에 비유하면서 분쟁 클리닉을 계속해 간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다. 다른 터(기초)는 없다. 누구든 이 터 위에 집을 세울 수는 있으나 어떤 에도 타 없어지지 않을 진리의 집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라는 집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졌다할지라도 분쟁이라는 불에 의해 소멸되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10-15).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고 거룩하게 지켜가는 것, 이것이 분쟁을 넘어 승리하는 교회로 가는 비결이다(16-17). 이런 의미에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18-23). 바울은 고린도교회다움을 휘청거리게 한 이 모든 것을 훌훌 떨쳐버리고 주님의 터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람을 자랑하지 않는 주님의 교회로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주님의 터 위에 세워야 할 것은 바로 오직 주의 교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 외에 다른 터는 없다(10-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7)

 

   앞에서 바울은 씨 뿌리는 농부와 밭 이미지를 통해 교회의 교회다움을 그렸다면(5-9), 이번에는 건축가와 집이라는 그림을 가지고 교회스러움의 회복을 소망한다. 이는 말의 지혜가 낳은 분쟁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의 지혜의 지배권 안에서 다시금 그리스도의 터 위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지어지는 교회로서의 너희를 향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바울이 이 건축예화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 자신은 이미 놓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기초를 놓았고 지금 그 기초 위에 너희가 보듯이 다른 사람이 여러 재료를 사용한 집들을 세우지만(10-12), 그러나 각 사람의 공로가 드러날 그날이’(그리스도의 날, 1.8) 불로써 이 사람들의 공로를 밝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공로가 어떠한가를 시험할 것이다고 말한다(13).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날의 불 시험 이후에도 공로가 남아 있으냐, 그렇지 않느냐 중요하다(14-15; 참고. 7:24-27):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8)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9b)는 주제가 건축예화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결국 이 대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로 통합되고 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성전’(16-17)은 각 개인(6.19)이 아닌 신자의 무리, 즉 고린도교회라는 공동체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여기에 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 또한 너희 안에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함으로써 비록 어린아이이기는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2.14)과는 분명히 다른, 바울과 다른 여러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가고 있는, 그러나 그날에 어떤 모습으로 공력이 나타날 것인가라는 긴장 안에 있는 교회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17절이다. 어쩌면 이 17절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교회 클리닉의 결론이지 싶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분파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교회의 정체성을 보다 명백하게 선포함으로써 이 모든 소모전, 즉 분쟁과 지혜타령이라는 이전투구(泥田鬪狗)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교회로의 회복을 축구한다(1.2,30).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지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

     너희가 바로 그 성전이다.”(17, 표준 신약전서)

 

바울은 지금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자이며, 누가 이 성전을 무너지게 하는 자인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고린도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aims)를 제시한다. 이것을 향해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져가고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치르는 산고(産苦)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지금 고린도교회가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언행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이 대목을 기록하는 바울의 모습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 소망은 없다는 선포다.

 

 

지혜논증 해법(18-23)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19)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20)

 

그리고서 다시 지혜를 다루는 것은 자연스럽다. 마침내 지혜신학(智慧神學)에 대한 긴 이야기에 몇 마디를 더 부연함으로써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어서 빨리 오늘의 분쟁을 떨고 일어나 지난 날 자신과 함께 누렸던 십자가의 도의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이 모든 소용돌이의 주범은 바로 세상의 지혜가 교회 안을 휘젓고 다닌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 있을 때’(12.2)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하여진 성도로 있을 때(16, 1.2a)가 분명하게 구분(구별)되고 또 다르다면,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헛된 신기루를 더 이상 쫒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명한다(18-20; 참조. 5.13, 94.11). 이제 고린도교회는 세상의 지혜라는 허망한 기준을 따라 사람을 자랑하던 옛습관을 버릴 때가 되었다(21). , 분파주의를 파기하라는 메시지다.

인본주의라는 분쟁과 세속주의라는 지혜의 양 날개를 꺾어버려야만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거룩한 삶을 향해 새 둥지(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를 내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것이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21b-22)는 그림을 바르게 이해하고 누릴 수 있게 한다. ‘우리마저도 너희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두고두고 내 안에 메아리친다. 나도 하나님의 교회의 것임을 조금씩 눈 떠 가는 시간이다.

 

 

부스러기 묵상

 

    분파주의 해법(1-15)

    하나님의 교회(16-17)

    지혜논쟁 해법(18-23)

 

세속적인 분파와 지혜가 마침내 온전해 지는 장(field)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교회다(16-17). 3장은 이렇듯 분쟁과 지혜라는 인간적인 이중창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다시는 용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십자가의 도를 헛되게 하는 말의 지혜와 그것의 한 열매인 분쟁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모독한다면, 그러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17a) 하신다.

교회가 교회되는 일에 인간(세상, )의 지혜가 역작용을 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것은 늘 분쟁과 분열을 낳는 씨앗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뿌린 것을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거두게 하는 심각한 혼돈 가운데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게 다 사람의 지혜를 앞세워 언행(言行)하는 자들 때문이 아닌가. ,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제는 교회의 분쟁을 낳은 어리석은 세상(육신, 2.3)의 지혜를 버릴 때가 되었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그리스도, 성령, 1.24, 2.7,13)의 지혜를 회복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이를 가로막고 있는 인간의 지혜를 바울은 무엇으로 넘었고 해결했는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치는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2.13), 이는 바로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가.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지혜라는 창()을 통해 진단한 교회 클리닉, 곧 분쟁해법이다.

우리너희와의 만남을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신령한 자의 소명일까. (권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태도와 표현과 마음까지도 얼마나 소중하게 다스리고 준비해야 하는 나 자신과의 또 다른 준비임을 세삼 깨닫게 된다. 바울처럼 교회를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대우하며 섬길 수 있다면 뭐가 문제일까. 너희 때문에 교회가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쪽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 몫들을 다듬고 준비하고 채워가는 것이 더 중요한 소명이라는 생각, 바울 곁에 머물면서 붙들고 깨닫는 부스러기들이다.

때때로 우리와 너희의 두 모습을 넘나들고 있는 나를 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는 너희지만 교회 앞에서는 우리인 나를 본다. 비록 하는 때도 있지만... 사실 바울 역시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의 실존을 보며 온 몸과 마음으로 탄식했듯이(7.7-25) 이 전쟁은 나에게도 아직 끝나지 않는, 그리고 언제까지나 끝날 것 같지 않은 미완의 영적 전쟁이다. 너희를 향해 든 돌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돌을 들면서, 고린도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생각해 본다. 지금껏 너무 쉽게 고린도교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했던 것이 왜 이리 부끄럽고 송구한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희망이다 말씀하시는 주님이 보여서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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