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해법.紛爭解法(고전 3.1-9)

2020605(묵상)

 

 

 

분쟁해법(紛爭解法)

1 Cor. 3.1-9

  

 

   본문 관찰

 

    육신에 속한 자(1-4)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아직도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분파주의 해법(5-9)

    아볼로는 바울은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일반이나(똑 같으나)

   

 

사역자론(使役者論)

 

너희와 사역자(일꾼)들의 관계가 분파주의에 따른 분쟁 해법의 실마리다.

이미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1.2)이지만 아직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1b)이고, 때문에 아직도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3) 이것이 바로 현() 고린도교회(너희).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을 토해 낼 수 있느냐 하면, 다름 아닌 분파주의 때문이다(4). 여기까지가 앞서 2장에서도 밝혀진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실상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울은 진단하는 자로서만이 아닌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목회자로서 고린도교회 앞에 선다. 이것이 사색당파(四色黨派)의 소용돌이에서 사역자론(使役者論)으로 진검승부(眞劍勝負)를 펼치는 이유다(4-9, 1.12). 무엇이 사역자(일꾼)일 뿐인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를 그리스도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주님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분열을 낳게 했는가. 동시에 무엇이 분파주의자들의 착각인가.

 

 

육신에 속한 자(1-4)

 

고린도교회(너희)이방인으로 있을 때”(12.2a)에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되었다(12.2a 1.2). 그러나 문제는 그때나 지금 이 편지를 받을 때나 변함없이 어린아이다는 점이다(1-2). 그렇다면 어느 순간 영적인 성장(성숙)이 멈춰버린 성인아이, 곧 육신에 속한 자(1b)로 지금껏 살아온 셈이다.

이것이 지금 너희(육신에 속한 자=어린아이, 1-3)가 우리(신령한 자=온전한 자, 1a, 2.6,15)와 다르며, 그래서 바로 그 우리너희에게 하는 이 모든 것을 판단’(2.15)하는 가르침을 들어야 하는 이유다. 저들의 영적 실체를 분별해 가면서 저들의 실상을 밝히는 바울의 해법이 놀랍기만 하다.

한편 시기와 분쟁(3, 1.10-11, 11.18)어린아이쩍 버릇이다. 이것이야 말로 아직도’(2b) 너희가 말의 지혜를 따라 춤을 추는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을 밝혀주는 증거다(3). 증거는 또 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4)는 식으로 파당을 지어 한 몸인 주님의 교회를 사분오열(四分五裂,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1.12) 시키고 있음이 그것이다.

영적성장(靈的成長)이 멈춰버린 결과가 이런 식으로 교회를 분열케 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성도의 이중성 아닐까. 감사들이 넘쳐남에도 책망들 역시 부족하지 않는 이 두 모습(1.4-9 1.10- ), 어찌 고린도교회만의 문제겠는가. 이런저런 증거들을 종합해 보니 나 역시 너희 무리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2.14)이 아니고, 그래도 육신에 속한 자’(어린아이)라며 안심하기에는 진단서의 목록들이 심상찮아 보인다.

 

 

분파주의 해법(5-9)

 

분쟁하는 자는 그 자신이 곧 육신에 속한 자인 것을 결과적으로 시인하는 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4). 하지만 놀라는 점은 바울은 이런 관찰들을 통해 저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끝맺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는 너희의 약함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메시지가 갖는 설득력이다. 그는 분쟁으로 뒤죽박죽이 된 상황에서도 이 문제를 바르게 풀어가는 일에 결코 흔들리는 기색이 없다.

너희가 그렇게도 높여놓은 아볼로나 바울은 누구인가: “주께서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5b) 사역자, 즉 너희로 하여금 주님을 믿게 한 일꾼에 불과한 자들이라 말한다. 심었고 물을 주었다고 해서 뭐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로되”(7a)를 고백하는 바울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은 또 있다: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라.”(14.15a)

 

이런 고백은 아볼로에게서 희미하게 느껴지지만(16.12), 게바(베드로)에게서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10.25-26) 이렇듯 우리는 별 문제가 없는데 저희가 이상하게도 몇 사람을 사람 이상의 높은 자리에 올려놔 버렸다. 이것은 자신(너희)들 뿐만 아니라 공동체까지 변질되게 만드는 무서운 독()이다.

육신에 속한 자는 이러한 올무에 걸려들 수 있다는 점, 잊지 않고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저들은 문제만 일으킬 뿐 그것을 해결할 능력(수준)은 없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안고 있는 심각성이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교회가 이런 식으로 세속화되어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문제를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오직 목양일념(牧羊一念)으로 헌신하는 바울이 있기에 든든하다.

바울은 어찌되었건 분파주의 해법의 일순위에 자신을 세워 놓고 소위 바울파에 서서 교회를 분쟁케 한 자들이 먼저 육신에 속한 자의 못남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그는 아볼로와 게바 쪽에 서서 교회를 어지럽힌 자들에게도 동일한 권면을 해 나간다(4-6,22). 비록 원치 않는 일이었고, 하지만 나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기에 나 몰라라 할 수 있었지만 -나에게는 이런 면이 없나?- 먼저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 솔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9a) 그리고 너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9b)이라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진리를 붙든다. 바로 이 대목이 바울이 보다 적극적으로 분파주의로 얼룩진 고린도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해결을 모색하는 대목이다. , 너희가 분파주의의 대표들로 세워놔 버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교회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자들이라는,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7),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로부터 영광을 얻을 분이심이라는 점, 이것이야 말로 사분오열(四分五裂)된 고린도교회를 회복하게 하는 바울의 처방전이다.

  

 

부스러기 묵상

 

    우리(온전한 자들, 신령한 자들, 1, 2.6,15)

    너희(고린도교회, 육신에 속한 자, 1)

    저희(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2.14)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다.

육신에 속한 자는 자신을 새롭게 할 능력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분쟁케 하는 일 뿐이다. 그럼 이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 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목회(牧會)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아직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로서 어린아이 수준을 넘지 못하는 성인아이 고린도교회(3), 어찌할까.

바울은 이처럼 저들을 올무에 넣어버린 말의 지혜’(세상의 지혜)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오도록 하는 해법을 찾는다. 이를 위해 먼저 저들의 지혜가 낳은 생각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긍정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위치를 교정해 준다. 비록 시기와 분쟁으로 얼룩지기는 했지만 너희는 하나님이 밭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선(同線)에 서서 주님을 나뉘게 한 자가 아니라 너희 밭에 복음을 심고 물을 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5-9, 1.12-13a).

이렇듯 너희와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다른 것이지, 우리가 너희와 다르다고 해서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역시 아무 것도 아니로되!”(7a) 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2.15)는 면에서 너희에게 이처럼 권면하고 가르칠 수 있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바울에게서 배운다.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여전히 희망을 심고 있는 농부로서의 목회자 바울에게서다. 비록 원치 않은 것이 자라났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은 자라남을 위해 지불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플지라도 치루어야 할 대가를 결코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가 없기에 좋은 교회가 아니라 만난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주신 지혜를 따라 이겨나가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다.

탄탄하게 균형 잡힌 바울의 영적(靈的)이며 목회적인 섬김(After Service)이 너희 같은 나에게 우리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으니 안심이다. 잠시 나 잘 난 맛에 우쭐했던 너희 언행(言行)을 이쯤에서 버리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자라나는 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묵은 땅을 기경해야겠다. 좋은 것들은 온대간대 없고 시기와 분쟁만이 자라는 척박한 땅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희망을 일구어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영광스런 회복을 캐고자 하는 바울을 본다. 그러다가 돌이켜 나를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묵상의 창을 통해 한 눈으로는 바울을 통해 주님을 보고, 다른 한 눈으론 역시 바울을 통해 나를 보고 있다. 저만큼 고린도교회가 보인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이 그리스도와 동급처럼 언급되는 것 자체에 경악한다. 무릇 목회자는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5b)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주의 몸된 교회를 건축하는 건축자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지도자 곧 사역자들일 뿐이다. 우리 교회 또한 이처럼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도록 오직 교회의 터(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고백하고 따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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