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신학.神智神學(고전 2.1-16)

20200604(묵상)

  

 

 

신지신학(神智神學)

1 Cor. 2.1-16

 

 

  본문 관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4)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5)

      ↔ 그러나’(6a)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6)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7)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8)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13)

   

 

지혜논증(2)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대한 논증이 계속된다.

바울이 2장으로 넘어와서도 하나님의 지혜’(7) vs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지혜(8)와 세상(사람)의 지혜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지금 고린도교회가 어느 지혜를 따라 분쟁하고 있는가가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러나’(6a)로 시작(역전)되는 지혜논증의 탁월함이다.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해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인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음을 회고함이다(1-5). 그럼 십자가의 도’(1.18)가 왜 세상 지혜와 다른가. 만일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하나님의 지혜; 7,12)을 받았다면 지금처럼 분쟁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십자가의 도)을 전하는 일에 애썼을 것이다. 이것이 너희(1-5)와 우리(6-16)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또 다른 이름_십자가(1-5)

 

    하나님의 지혜(7)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지혜(8)

      vs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탁월한 말이나 지혜, 1)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4)

    사람의 지혜(세상의 지혜; 5,6)

 

바울만큼 말과 지혜’(지혜의 권하는 말, 4a)에 뛰어난 자가 또 있을까(1). 그런데 그는 지난날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바로 그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않았다(2). 오히려 네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고 회고한다.

그럼 무엇인가. [바울파]까지 만들어 버린 너희(‘말의 지혜’)들의 분쟁하는 교회를 향해 그렇다면 지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울은 현재의 분쟁하는 공동체가 아닌 지난날 저희와의 사이에 임했던 복음의 현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4b-5)던 바로 그 복음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선언이다. 너희가 주님을 나누어지게 하면서까지 [바울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자신이 바랬던 교회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호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면서까지 인간 바울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잘못 가르치고 섬긴 것이라는 눈물의 고백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자신이 그처럼 사람의 지혜’(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지혜의 권하는 말)에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느냐는, 그렇다면 이는 바울이 한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너희 믿음의 기초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작된 건강한 교회가 어떻게 된 것이 말의 지혜가 낳은 분쟁의 열매 같은 것을 맺고 있으니, 고린도교회는 그만큼 복음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 vs 사람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7)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지혜(8)

      vs

    세상의 지혜(6)

    세상의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6)

    사람의 지혜(13)

 

이 대목에서 절묘한 것은 그러나’(6a)로 대칭되는 너희’(1-5)우리’(6-16)의 두 그림이다. 바울은 지혜와 관련된 좀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간다. 이는 분쟁과 파당이 말의 지혜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렇다면 너희의 영적 정체(identity)는 무엇이냐에 대한 바울의 통찰이다. 또한 동시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보다 심오한 지혜신학(智慧神學)인 셈이다.

마침내 감추었던 것곧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7a),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8a)-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7b)인 지혜인데, 이것을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10a)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7b) -크도다! 이 비밀이여!- 은혜로 주셨다. 누구에게? 너희가 아닌 우리에게!

이로써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하심이 우리’(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된 자)에게 알려졌으니 얼마나 감사한가(12).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사유로부터 만들어낸 너희(세상)의 지혜의 근본적인 차이다. 지금 바울이 이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너희’(1-5)우리’(6-16)와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서 있다면, 그럼 너희 안에 있는 분쟁은 과연 무엇이냐를 생각하도록 하고 싶어서다.

동일한 지혜라면 분쟁타령이나 하는 교회로 추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렇듯 세상(통치자)의 지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혜와 단절되어 있다. 만일 이 지혜를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알았다면 저들은 영광의 주를 결코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8). 동시에 너희가 이 지혜를 알고, 또 그 안에 있다면 결코 성도의 신분(1.2,30)과 다른 세상의 지혜 수준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발하는 너희의 정체다. 지혜란 무릇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6a)는 것처럼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이”(10)신 것과 같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12a)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마침내 사색당파(四色黨派)로 그리스도를 나누어지게 한 너희의 지혜가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세상의 파편들에 불과한 것인가가 드러났다.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부터 은혜로 주신 것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라는 바울의 신학(10), 그만큼 너희(분파주의자)가 앞세우는 지혜가 얼마나 헛된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사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어서 신적(神的) 지혜를 받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15)함을 부연한다. 이는 다시 너희가 물고 늘어질 헛된 지혜논쟁의 불씨를 차단하겠다는 바울의 포석이 아닌가 싶다.

한편 또 놀라는 것은 14절이다. 그런 중에도 바울은 너희를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과 구분한다. 이는 이어질 3장의 육신에 속한 자’(영적 어린아이, 3.1-3)와도 또 다른 것인데, 이로써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또 다시 세상의 지혜에 의존하여 지혜(분쟁)타령이나 일삼는다면 너희는 14절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할 것이라는, 말하자면 이번 기회에 일종의 경고까지를 겸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너희 역시 우리가 되는 은혜 앞으로 나아오던지, 아니면 육에 속한 사람’(14)임을 시인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바울의 논증이 참으로 놀라운 예화가 되어 고린도교회 앞에 날아가고 있다. 이렇듯 저희 역시 갈라디아교회와 동일한 말씀 앞에 서 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참조. 12,4-9,26a,30) 이는 우리 메시지를 듣고 깨달아 돌이킨다면 희망 있지만 계속해서 너희 타령을 반복하며 살아간다면 너희의 끝은 자명하다는 얘기다.

 

 

부스러기 묵상

 

    너희(1-5, =세상의 영을 받은 자, 12) = 세상의 지혜

    육신에 속한 자(3.1-3, 어린아이)

      ↔ 그러나’(6a)

    우리(6-16,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자, 12) = 하나님의 지혜

    온전한 자들(=신령한 자들, 6,15, 3.1)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지혜신학(智慧神學)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6a)로 대칭되는 두 지혜의 대비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너희의 모습, 즉 분쟁이나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너희가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7)를 아는 자라 할 수 있느냐를 말하는 바울의 지혜를 볼 때 그렇다. 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 14)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가 사람의 지혜(육신에 속한 자, 3.1-3)를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성령을 받은 자)를 따라 다시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신지신학(神智神學)에로의 초대다.

자연인(14)으로서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아직 고린도교회(너희)는 소망이 있다. 이미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1.30a), 또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1:2a)이지만 아직은 육신에 속한 자(어린아이, 3.1-3)가 바로 고린도교회여서 그렇다. 그러므로 어느 때부터 영적 성장이 멈춰버리도록 한 세상의 지혜를 버리고, ‘우리처럼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자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이 목회자 바울의 모습이 빛나는 대목이다.

교회의 건강은 얼마나 말잔치가 풍성한가에 있지 않다. 이것은 필시 분쟁과 파벌을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는 일에 줄서기 하는 빛바랜 교회로 추락하게 할 뿐이다. 고린도교회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든든히 세워져가는 것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이것이 바울의 눈에 그대로 보여졌고, 마침내 해법이 하나 둘 전달되고 있는 중이다.

바울이 써내려가는 치료법(처방전)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가 난무하는 장(field)으로서의 교회로는 희망이 없다는, 결국 너희가 그거나 하고 있으라고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또한 우리의 영적 우월함이 너희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면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바울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할() 일과 성령님이 한() 일을 구분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것만큼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으며,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삶과 복음의 현장에서 그대로 준행하며 살았다. 복음보다 앞서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1b)과 결합된(신인협동) 복음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며 살았던 바울에게서 말의 지혜를 앞세우려는 나의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을 본다.

십자가의 복음을 사람의 말의 어떠함으로 더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죄다. 복음은 언제나 본문으로만 읽고,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의 지혜로 설교를 가득 채웠다면 이 역시 회개할 제목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마저도 듣기 좋은 말로 설명해 버렸던, 그러니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4b)은 온대간대 없고, 그랬으니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의 말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주님이 서실 자리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그토록 철저하게 거부하며 살았던 바울을 생각한다. 그는 주인과 종은 구분(구별)할 줄 알았고, 또한 청중들에게도 그것을 잘 분별하도록 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를 민감하게 살폈다. 바울은 주님과 복음을 자신의 능력의 유무에 따라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그러니까 복음이 능력인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능력인가에 대해 혼돈하지 않았고, 또한 이런 소용돌이(유혹)로부터 철저하리만큼 자신을 지켰다.

더 쉬운 말로 하면, 바울은 복음을 사유화(私有化)하지 않았다. 바울마저도 복음과 주님의 영광 뒤에 숨었다. 이 아침에 주님은 말씀하신다: “, OOO!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너희, 아니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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