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당파.四色黨派(고전 1.10-17)

20040502(묵상)

   

 

 

사색당파(四色黨派)

1 Cor. 1.10-17

 

 

본문 관찰

 

분 쟁(10-12): 분파주의 온전히 합하라!

분쟁이 없이(10):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분쟁이 있다(11): ‘말의 지혜’(17)

분쟁 클리닉(13-17) 어찌 나뉘었느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

 

   분쟁(분열, 다툼)과 세례가 함께 언급되고 있다.

아마도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고 세례를 집례한 자가 다른 자보다 얼마나 더 능력 있는 지도자인가, 뭐 이런저런 것들이 서로 맞물려 분열의 빌미가 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5)하다는 감사의 제목들이 어느덧 세상()의 지혜’(1.18-2.16)라는 잣대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해 버렸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것이 감사’(4-9)의 빛 아래 조망되기 시작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랑의 책망’(8,10- )이 서 있는 자리다.

 

 

사색당파(四色黨派, 10-12)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11b)

 

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만큼은 너희는 모두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열이 없이 온전히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10b)는 바울의 말(마음)이 뜻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결과적으로 같은 말마음뜻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분열(다툼)은 분파와 파당으로 교회를 네 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12). 이 문제가 세례와 연결된 것을 보면(13b-17a), 아마도 나는 ○○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자랑으로 출발한 티격태격이 급기야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세례라고 다 세례냐 누구에게 받느냐가 더 중요하고, 따라서 이 정도의 사람에게 세례를 받아야 그게 더 차원 높은 것 아니겠냐는 뭐 이런저런 논쟁들이 마침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사색당파(四色黨派)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지 싶다.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5)하다는 하나님이 고린도교회에 주신 감사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고, 그것이 다른 파에 속한 것보다 얼마나 더 우월하고 지혜 있는 경우인가를 변증하고, 그래서 서로 골이 깊어가다 못해 결국 파당(파벌, 분파)으로 네 조각이 나 버렸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까지 끝없이 높아지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우월하고 고상하다는 것을 어떻게든 입증해야 한다는 이런 세속적인 생각들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밀려들어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목사파, 장로파, 개척파, 실세파, 권사파 등등으로 사분오열(四分五裂)된 현대교회의 악몽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분쟁 클리닉(13-17)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3a)

 

바울의 접근 방식에 주목한다. 문제의 원인을 너에게서가 아니라 먼저 나에게서 찾는다: “나는 바울에게 속한 자라?(12) 그리고 그것을 처리하는 것으로부터 문제 해결을 시작한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13b) 아마도 바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고 다른 파벌과 암암리에 논쟁(언쟁, 분쟁, 다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탄했을 것이다.

주님 한 분만이 영광을 받고, 이를 위해 십자가의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도 세속의 창일한 파도 앞에 고린도라는 항구도시가 영적(靈的)으로 건강하게 세워지는 일을 자신할 수 없는 때다. 이런 때에 내전(內戰)이나 치르고 있으니, 그것도 진리를 사수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서로 자기가 속한 파()가 옳고 더 우월하다는 것을 위해 다투고 있으니 이러고도 교회(敎會)요 성도(聖徒)란 말인가.

바울은 지금 자신에게 속해 있다며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소위 [바울파]에게 먼저 각()을 세운다(13-16). 주님과 동선(同線)에 설만큼 사람(바울, 아볼로, 게바)이 대단하다면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이 거역할 수 없는 선언에 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13)

무릇 가정에서도 큰 자녀에게 호통을 치면 그게 다른 자녀들에게 다 해당되는 메시지가 되는 것처럼 지금 나머지 다른 세 파당에게도 바울의 질타는 유효하다. 분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런 일련의 언행(言行)이 곧 주님을 나누어지게 하는, 그러니까 한 주님 안에 있는 주님의 교회를 네 조각으로 나누어지게 하는 결코 가볍게 묵과할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결국 바울은 너희들이 틀렸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듯 분쟁(다툼)이나 일삼는 말의 지혜가 아닌 주께서 주신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하는 길임을 분명하게 집고 넘어간다(17). 이처럼 분파주의자들의 말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할 만큼 파괴력이 있다는 얘기다. 동시에 분쟁이 단순히 말다툼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인데, 이런 진단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증거들은 -고린도전서 전체가 그 증거다.- 이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부스러기 묵상

 

교회가 네 조각으로 나누어져 버렸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가장 염려하고 걱정했던 바로 그 다른 복음’(1.6-10)이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람으로 편이 갈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바울파]라니! 아무리 영적(靈的)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볼 수 없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육에 속한 사람’, 3.1-2)일지라도 말의 지혜’(17b)를 따라 이처럼 추락할 수 있단 말인가.

17절이 놀랍다. 그것도 말의 지혜라는 바울의 해법 말이다. 바울은 교회의 분쟁 중심에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말의 지혜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기 때문임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소위 [분쟁클리닉](1-4) 안에 위치한 지혜논쟁’(1.18-3.23)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17절은 하나의 다리(bridge) 역할을 하면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통해 새롭게 세워져 가는 고린도신학의 토대가 된다.

무릇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그것에 접근해 가는 방법은 마치 암세포(癌細胞)가 퍼져 복수(腹水)가 차는데도 운동 부족에 따른 비만으로 생긴 똥배라고 진단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원인을 찾아내고 그 근본을 따라 접근해 가는 것이 명의(名醫)이듯이 목사는 한 교회의 영적 기상도를 이처럼 살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쉬운 것은 바울처럼 하는 것이 옳아 보이고,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은데 문제는 내게 그럴 만 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에 대해, 바울의 목회에 대해 말(훈수)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불과 몇 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하수(下手)에 불과한 나를 어찌하랴!

답은 없을까. 나 역시 고린도교회처럼 주님을 옆으로 슬쩍 돌려놓고서 내 야망을 비전이라 만들어 교회를 사당화(私黨化)하려는 꼼수를 꿈꾸고 있지는 않는지 고린도교회가 들었던 복음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을 다 내려놓고, 그 중에 특히 나의 잔재주나 잔머리에서 나오는 세상적인 지극히 세속적인 말의 지혜를 버리는 것 밖에는 회생의 길이 없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금 선명한 오직 복음앞에 서야겠다. 나 역시 고린도 성도들처럼 주님의 교회 앞에 방해꺼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의 피값으로 사신 몸된 교회를 내 심령 안에 품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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