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④ - 그 사역동기(고후 5.11-21)

20030202-03(묵상)

  

 

 

사도직- 그 사역동기

2 Cor. 5.11-21

  

   본문 관찰

 

   사신(使臣)되기(11-15)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사신(使臣)하기(16-21)

      새로운 피조물(16-17)

         →

      화 목(18-21)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使臣)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울의 인생행로의 시각과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15).

다시는 바울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이제부터는’(16) 주님을 위해 사는 자로 스타트하는 새로운 피조물’(17)임을 선포한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14a). 이처럼 사신(使臣)이 된 동기가 분명해진만큼 동시에 사신으로서의 메시지(message) 역시 선명하게 펄럭인다(11-15 16-21). 그것은 화목의 대사로 고린도교회를 섬기는 일이다.

마침내 이렇게 해서 분파주의자들인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12, 3.1)에게 대답할 분명한 복음이 고린도교회에 새롭게 자라게 된 것이다. 저들과 다르게 사는 새언약의 일꾼인 사역자들을 통해서다. 마침내 새로운 피조물에로의 영적 밭갈이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 너희에게로 알려져야 하는 화목의 복음이다(18-21).

   

 

사신(使臣)되기(11-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4a)

 

바울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11a),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14a) [사신되기]의 한 동기였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12b)을 배경으로 슬쩍 비춰줌으로써 고린도교회라는 그림이 저들 때문에 얼마나 엉망이 되어있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 바울의 초점은 오직 하나님과 고린도교회인데(13),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12, 3.1)은 사신(使臣)이 된 동기부터가 전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고린도교회가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저들의 양심에도 하나님이 알려져야 한다(11).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성이 무디어져 있기에 추천서파동을 주도하는 바울 흔들기의 선수들이 활보하고 있는 것이고(12, 3.1), 그것만큼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바울의 진심(13)과 불타는 그리스도의 사랑(14a)이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로 하여금 사도로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14-15).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15) 살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을 헛되지 않게 하는 다시 산 자의 사명이다. 바울은 이 진리와 은총에 온 몸으로 헌신하고자 사신(使臣)되기에 기꺼이 헌신했다고 말한다.

   

 

사신(使臣)하기(16-21)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使臣)이 되어 간청하노니 .”(20)

 

바울도 자신을 위하여살 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 어리석은 게 없었다. 하지만 구원의 복음을 받고서 그는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주님과 연합하고 보니 이제부터는’(16)이라는 고백으로 눈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로써 사신(使臣)하기의 기초가 놓인 셈이다. 한편 사신으로서의 메시지(18-21)를 증거하는 일을 수행키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과정을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새로운 피조물(17) → ② 화목하게 하는 직분(18) → ③ 화목하게 하는 말씀(19)

사신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15a), 또 성도들은 물론 주님을 육체대로알지 않는 사람이다(16). 무릇 사신(使臣), 그것도 그리스도의 대사’(Christ's ambassadors)는 자기를 이처럼 보내시고, 또 쓰시는 자를 위해 존재하는 자다. 그렇다면 그는 이 일을 맡기 이전에 자기를 쓰시려는 자와 먼저 화목(和睦)하게 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의 의미다(17-18a).

주님은 바로 이 사람에게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19a)기 위해 화목하게 하는 직분’(18)을 맡기신다. 이처럼 사신은 어떤 사람’(3.1)들이 그럴 듯하게 행세하는 것처럼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슨 청운의 꿈을 품고 입문하는, 스스로 깨달아 아는 어떤 득도(得道)의 과정이 아니다. 사신은 보내시는 자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서(17), 마침내 그분의 신임장(信任狀, 18)을 받고, 그리고 그분의 메시지(message, 19-21)를 비로소 전달하는 것, 이것이 사신의 존재 목적이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18a)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19a)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그럼 이제 사신이 전할 메시지(20-21)는 다름 아닌 화목(reconciliation)인 것이 분명해졌다. 바울은 지금 화목의 대사로 고린도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처럼 그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파송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만큼 하나님은 지금 고린도교회가 영적으로 정상화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바울을 전권대사로 파송하시면서까지 말이다.

바울의 통찰이 멋지고 아름다운 것은 마치 강물을 온통 흐리게 만드는 미꾸라지 같은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12, ‘어떤 사람’ - 3.1)의 고린도교회 흔들기가 단순히 바울과의 불화를 낳은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보다 깊고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음을 놓치지 않는데 있다. 율법이라는 없어질 영광’(3.11)에 현혹되어 율법주의와 유대주의라는 다른 복음’(1.6-10)으로 고린도교회를 흔드는 사탄의 도구됨을 박차고 일어나는 것, 이것이 사신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읽은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메시지의 본 뜻이다.

  

 

부스러기 묵상

 

화목(和睦, reconciliation)이라는 단어가 자꾸 어른거린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18b)는데 나는 이를 잘 감당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스도의 대사직(Christ's ambassadors)은 그냥 폼으로 맡은 게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듯이(18a),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듯이(19a), 하나님은 지금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대독(代讀)하는 메시지를 통해 고린도교회와의 화목을 기대하신다.

하나님은 마치 집안의 탕자’(15.25-32)처럼 아들답지 못한 고린도교회를 이처럼 끝까지 품고 가신다. 다시 부자(父子) 관계의 회복과 화목을 꿈꾸신다. 놀라운 것은 이 일을 바울을 통해, 그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삼으사 이루고 싶어 하신다. 무릇 사도는 화목의 대사라는 직책(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KJV)을 받아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대사(大使)는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가를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이게 중요하다. 바울이 하나님과 고린도교회의 화목을 위해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움을 받아, 더불어 이처럼 섬기는 자로 자신의 소임을 감당하듯이 말이다. 나는 진정 바울처럼 교회를 섬기는 대사인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본다.

직분을 직분답게 하는 힘은 이제부터는 새로운 피조물이라!”(16-17)하신 거듭남과 의롭다함이라는 은총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것이 끊임없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영적인 생물(生物)됨을 유지하고, 더 풍성케 되는 일에 성공하지 않으면 알은 낳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는 닭처럼 화석화된 신앙, 아직도 머리의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한 채(3.12-15) 이름뿐인 직분만 자랑하는 참으로 꼴사나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바울에게는 주님을 육체대로알았던 때와 이같이 알지 아니한 때가 이제부터는이라는 시간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고서 필요를 따라 줄타기를 하는 이중성으로는 새 것으로서의 사명과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기는 일에 화목의 사신이라는 비전을 성취할 수 있는 사도적 직분을 완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새언약의 일꾼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해야겠다.

바울다움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간다. 정말 주님이 우리의 생()의 전부라는 것을 사심(私心)없이 고백한다면 그것을 복음의 일꾼으로 사역함으로 주께 드려야 되지 않을까. 오늘도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함께 목회(牧會)와 사역을 통해 주께서 주셨다. 이 영적 목마름을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또 다시 퍼올린다. 내게도 바울처럼 품을 수 있는 고린도교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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