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② - 그 우월성(고후 3.7-18)

20200929(묵상)

   

 

 

사도직- 그 우월성

2 Cor. 3.7-18

  

   본문 관찰

 

   ‘언약 - 없어질 영광

      vs

   ‘언약 - 길이 있을 영광

      ‖

   자유

   

 

옛언약 vs 새언약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1.6)

 

이번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이중성이 전면에 부각된다.

사실 어떤 사람’(1)으로 지목되는 분리주의자들은 겉으로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함으로써 바울파의 깃발 아래 고린도교회에 파당을 형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저들의 속셈은 유대주의에로의 회귀, 즉 은혜의 복음이 아닌 율법주의의 부흥을 갈망하는 복음주의(율법주의)를 통해 교회를 장악하려는 다른 복음의 주창자들이었다. 사도마저도 적당한 명분을 내세워 교회 지도력으로부터 밀어내려는 시도, 이 전통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때문에 바울은 옛언약(율법)의 영광과 새언약(복음)의 영광을 비교하면서, 자신은 없어지지 않고 길이 있을 더 없이 큰 영광의 새언약을 위한 일꾼’(6a, 사도)임을 분명히 한다. 이렇게 되면 율법주의자들은 어찌 되는가. 이것이 바울복음과 그것의 변증이 갖는 탁월성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1)은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15)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모 세_‘언약: 없어질 영광

   ↔

바 울_‘언약: 길이 있을 영광

 

   모세 - / 돌비 / 의문(儀文) /

   (옛언약의 일꾼) / 의문의 직분 / 정죄의 직분 /

      없어질 영광 수건을 얼굴에’(13)

      vs

   바울 - 하나님의 영() / 육의 심비 / /

   새언약의 일꾼 / 영의 직분 / 의의 직분 /

      길이 있을 영광 담대히’(12)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7)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 받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34.29-35). 그렇다. 율법(‘언약)은 그것 자체가 영광이기는 하지만 복음(‘언약)은 이제 그보다 더 큰 영광이기 때문에 과거에 영광스러웠던 것이 더 이상 영광이 일 수 없다(10). , 율법은 한시적으로 영광이었으며, 따라서 없어질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7b,10b,11a,13a,14b).

하지만 언약(복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생명의 직분(8), 사람을 의롭게 하는 직분(9), 영원히 있을 것(11), 그래서 율법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영광스럽다(11). 이렇듯 과거에 영광스러웠던 율법은 복음에게 자리를 내어놓고 없어질 영광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모세마저도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7,13).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고린도교회를 추천서라는 종이조각으로 좌지우지(左之右之) 하고 싶어하는 어떤 사람’(1)들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자들은 이미 없어진 영광으로 영원한 영광을 무력화하겠다고 야단들이다. 이미 은혜의 복음이 열방을 향해 그 영광의 빛을 비추고 있는 때에 율법이라는 깃발 아래 더 이상 영광이 아닌 잊혀진 과거에로의 회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복음이요, 진리의 부흥을 획책하는 사탄의 계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고린도교회가 이처럼 사악한 이단(異端)의 발톱 아래 놓이게 되었는지 .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그의 통찰을 다음과 같이 빛나고 담대하게 한다(12):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둔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옛 계약의 말씀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이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14-15, 현대인의성경)

바로 이것이 새언약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도를 거부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영적 무지다. 이미 세상은 변하였는데 아직도 옛 것의 없어진 영광을 붙들고 있으니, 그러면서 새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를 율법의 종으로 추락시키고자 사탄의 졸개들이기를 자임하고 있으니 실로 불쌍하기 짝 없는 노릇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유대주의(율법주의)자들에게 추천서를 써 준 사람들은 또 어떤 위인들인지 .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희망은 있다. 율법에서 복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것도 언제든지(16). 놀라운 것은 주의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는 사실이다(17). 동시에 주님께로 돌아가면 주의 영광을 보게 된다(18a). 이렇게 되면 점점 더한 영광으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18b). 이것이 복음 안에서 펼쳐갈 영광의 세계다. 바울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 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율법이라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바울 흔들기를 계속하겠다고?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2.16-17b)

 

율법의 영광을 보는 자는 아직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다(14,16).

따라서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의 영광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또 나아가려는 자들을 섬길 수도 없다. 오직 이 일은 새언약의 일군’(6a)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도들의 몫이다. 바울은 과히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하나는 율법에 비해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밝힘으로써 율법주의자들의 허구를 드러냄이다. 동시에 새언약의 종으로서의 사도됨을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계시의 점진적 진전(progressive)이라는 맥락에서 살핌으로써 사도권에 대한 성경적 기초와 그 우월성을 논증하였다.

[바울복음]에 의해 세워진 고린도교회마저 율법으로 회귀하는 역류현상이 나타날 정도였다면, 다시 말하면 이미 없어진 영광의 흔적이라는 과거의 전통과 제도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 신약교회 안에도 어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불안하고 못미더워서 하라! 하지 말라!”는 보이는 행동으로 측정할 수 있는 율법이라는 행위를 첨가해야 한다는 다른 복음이야말로 교회의 영광스러움과 복음의 기초 그 자체를 흔드는 강력한 사탄의 도구이다.

이처럼 교회 안으로까지 도도하게 흘러와 버린 율법이라는 없어질 영광’(7,11a)이 없어지고, 그야말로 길이 있을 것’(11b)인 복음의 영광이 온누리에 퍼지도록 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은 주님의 교회(백성)와 바로 그 교회의 감독자로 세움을 입은 사도들의 몫이다. 때문에 바울은 지금 이 위대한 사명을 영광스럽게 감당하기 위해 자신과 고린도교회가 다시 복음의 영광으로 돌아갈 것을 많은 눈물’(2.4a)을 담아 편지를 썼고, 또 쓰고 있다.

사도는 무엇이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14a) 복음의 영광을 보아야 할 그 마음을 덮고 있는가를 통찰하고 있다. 이게 지도자들의 몫이다. 나는 어떤가. 아직도 구약 안에 들어있는 복음의 빛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의 옛 영광을 추억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나는 과연 새언약의 일군’(6a)이라는 사명을 다 하고 있는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먼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영광스러움인 복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복음의 형식은 그럴 듯하게 전달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살아있는 십자가의 피로 얼룩진 복음의 내용은 결코 맛보지 못하며, 또 전할 수도 없다. 내 안에도 바울과 같은 살아있는 복음이 운동하고 있을 때에만 지금도 죄에 매여 율법의 종노릇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할 수 있고, 또 복음의 영광 앞으로 초대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 앞에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복음의 깃발을 들었던 사도처럼 이 땅을 향해 그렇게 복음의 영광이 부흥되는 그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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