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권, 오해와 변호(고후 10.1-18)

20201008(묵상)

   

 

 

사도권, 오해와 변호

2 Cor. 10.1-18

  

   본문 관찰

 

   싸우는 무기에 대하여(1-6)

   영적 권위에 대하여(7-11)

   자랑의 이유에 대하여(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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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 번째 주제인 바울의 사도권변호로 넘어간다(10-13).

일단 일인칭 ‘I’ 메시지(“나 바울은”, 1)가 인상적이다. 육체에 속한 병기를 가지고 고린도교회 안에 들어온 소위 육신으로행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부정하곤 하였다. 바울을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많았다는 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적대자들의 오해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행하는데 있어서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다(1-6). 둘째,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권위가 없다(7-11). 셋째, 고린도교회를 자랑할 입장에 있지 못하다(12-18).

그러나 과연 그런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고린도교회를 사탄이 까부는 빌미를 제공한 자들이야 말로 육신으로 외모만 보는”(3,7) 자들이다. 바울은 앞에서 이미 교회를 혼잡하게’(2.17) 하는 자들을 어떤 사람’(3.1a),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5.12)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죄하였다. 이렇듯 그는 일관되게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영적 싸움으로 보고 있다(3-4, 2.11). 그러므로 자신의 사도권을 둘러싼 오해들에 대해서도 신령한 차원에서 접근하여 답한다.

   

 

싸우는 무기에 대하여(1-6)

 

여러분을 마주 대하면 비겁하고 떠나 있으면 대담하다.”(1a, 현대인의성경, A)는 적대자들의 비난을 감추지 않고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말로 사용함으로써 사도권을 둘러싼 문제를 비껴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초지일관(初志一貫)하게 견지해 온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1b, B)는 중심이 흔들리거나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울은 비록 A하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B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만큼 주님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AB의 조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적대자들의 눈에 비춰진 그의 A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2a)로 보였고, 결국 바울의 육신으로의 무기는 형편없는 것이라 몰아 붙였다.

그러니까 바울에게는 사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무능력한 육체를 가진 자일 뿐이다는, 결국 사도가 아니니까 그의 가르침(편지, 방문, 바울복음)을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는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추천서도 없지 않은가(3.1)- 분파주의자들로서의 사악함이 숨어 있다. 교회는 이처럼 언제나 사탄의 표적이 되곤 한다. 고린도교회가 그랬듯이 지금 교회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럼 첫 번 오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무엇인가. A처럼 비난하는 자들이 육신으로’(육체대로) 행하는 자들이고(3), 이를 위해 저들이 쓰는 무기 역시 육체에 속한 것일 뿐이다고 논박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사도로서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마귀의 요새라도 파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 무기로 우리는 여러 가지 헛된 이론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대항하는 온갖 교만한 사상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하고 있습니다.”(4-5, 현대인의성경)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무기는 교회를 지키고, 진리를 사수하는 일을 위해 담대하게 사용되어질 수 있으며(2b), 결국에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벌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6b). 주님은 신령한 교회가 육체의 장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회개의 기회는 아직 있다(6a). 주께서 바울을 하나님의 병기로 준비하시고, 또 사용하시듯 우리 교회 또한 그렇게 쓰이는 도구이고 싶다.

   

 

영적 권위에 대하여(7-11)

 

바울의 대적자들이 한 또 다른 오해다: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10) 그러니까 언행일치(言行一致)가 아니라는 비난이다. 어떻게 하든 바울로 하여금 사도직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흔들어서 떨어뜨리겠다는 술책이다. 이것은 바울이 가지고 있는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몸도 약할 뿐만 아니라 설교도 형편없다는 아우성이다. 어찌 보면 사역자로서는 치명적인 문제에 걸려든 셈이다.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하고 있는 바울 역시 편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인간적인 모욕과 비토를 받으면서 아무런 심리적 부딪침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울마저도 이런 뜬소문(gossip)에 휩싸였다는 것이 좀 씁쓸하다.

한편 바울은 이 비난에 대해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7a)라고 말한다. 진정한 목양(牧羊, 바울 vs 고린도교회)의 관계는 해치기 위함이 아니라 세워주는 것이라는 원리의 빛 아래서 이루어진다(8). 이처럼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면 겉으로 드러난 모양만을 볼 수 밖에 없고(7,9,11), 그래서 편지나 설교에 대해서 겉만 보고이러쿵저러쿵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것에 있어서 자기 수준을 능가할 수 없다. ‘외모만 보는’(7a) 자는 그래서 바울이 사도권을 행사하는 것의 본질과, 목회적 지혜에 대해서 알 턱이 없다. 편지는 편지대로, 직접 만나서 나누는 말씀의 가르침은 그것대로, 바울이 의도하고 이끌어가는 밀고 당김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모르니까 바울의 언행(言行)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다. 이게 다 바울의 영적 권위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자랑의 이유에 대하여(12-18)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시비(是非)하게 된 이유는 유대주의적 분파주의자들이 바울이 수고하여 세우고, 또 이루어 놓은 일을 가로채고서 교회가 마치 자기들 것인 냥 자랑하는 것 때문이었다(15a,16a). 이게 다 자기를 칭찬하는 자’(12a)의 자화자찬(自畵自讚)이 낳은 불행이다. 하나님과 말씀이라는 표준을 떠나면 인간적인 기준과 잣대가 기준이 되어서 그것을 정한 사람의 의도대로 모든 게 흘러가 버린다.

그래서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우기 위해 수고한 것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15a) 자들이 아닌 우리(바울)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14). 또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자랑하는 것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13a) 하는 자들이 다른 사역자가 닦아 놓은 것을 가지고 자신의 공로로 된 것처럼 자랑하는 것과는 달리 좀 더 많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임을 밝힌다(16).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범위 내에서 하는 자랑이고(13b), 주 안에서 하는 자랑이다(17). 고린도교회를 위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 자들이 헛된 자랑과 남의 수고를 가지고”(15a) 무임승차(無賃乘車)하려는 것이야 말로 사도와는 근본적으로 상관이 없는 자다. 저들은 지금 바울 없는 고린도교회를 만들고,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장악하고 지배하려는 자들이다. 이 얼마나 악하고 추한 자들인가.

과연 무엇이 진정한 자랑인가를 놓치면 늘 이 허무한 자랑에 발을 담그게 된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사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거나 칭찬하지 않는다(18). 사도권의 진위(眞僞)는 칭찬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칭찬의 권위와 주도권을 누구에게 있는가를 알고, 그래서 자신을 각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14b)을 심는 것이고, 또한 거기에 만족해 버리고 자랑으로 흘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이 위로부터 난 사도의 삶이다.

   

 

부스러기 묵상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18)

 

나는 바울처럼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인가?

바울이 강하고 위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시험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지혜와, 그러면서도 언제나 자신보다는 교회와 주님을 우선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었다는데 있는 것 같다. 그는 풍랑을 만났으나 넘어지지는 않았고, 언제 어디서나 대적자들을 만났으나 저들의 계략에 말려들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더 강했고, 말씀으로, 오직 주의 종으로서 주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갔다.

그에게는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는 말이 생각나곤 한다. 어떤 역풍 속에서도 교회를 지키고,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역략을 집중할 수 있는 탁월한 사역자였다. 그가 이처럼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 무기를 소유했기 때문이다(3-4). 나에게도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5b) 하는 일이 어떻게, 무엇으로, 어디까지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묵상의 날개를 펴본다.

바울은 이처럼 쓰임 받아도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13) 자랑하며 살 정도로 절제하며 살았으나 나는 깃털처럼 작은 것도 황새처럼 큰 것으로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기절이 있으니 이를 어찌할까. 나를 신뢰하고, 나를 자랑하고, 그래서 교회와 성도를 나에게 유리하는 쪽으로 몰아간다면 바울의 사도권을 비난하는 자들과 다를 바 무엇이랴. 나는 주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18) 다시 이 말씀 앞에 나를 붙들어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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