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③ - 그 사역철학3(고후 5.1-10)

20030201(묵상)

  

 

 

사도직- 그 사역철학(3)

2 Cor. 5.1-10

  

   본문 관찰

 

   부활신앙(1-5)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심판대(6-10)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각각 선악(善惡)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장래의 소망이 있는 줄 아나니

 

사역으로부터 낙심하지 아니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다름 아닌 부활(1-5)과 심판(6-10)에 대한 장래의 소망이다. 이것이야말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1a)더라도, 즉 순교를 각오하면서 새언약의 일꾼으로 충성하게 하는 신앙의 동력이다. 이것은 단순히 죽음애찬’(“벗고자 함”, 4a)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애찬’(“덧입기”, 2,4b)을 간절히 사모하는, 즉 하늘을 향해 간절히 나아가는 치열한 삶을 사역의 기초로 삼음으로써 사도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비전)을 엿보는 대목이랄 수 있다.

따라서 항상 담대하”(6a), 그리고 믿음으로 행하”(7)는 것을 사역의 기본기로 삼는다. 이는 곧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9)는 목표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래의 심판으로부터 선악(善惡)간에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10)라는 보다 더 크고 원대한 사역에의 꿈을 통해 현재의 낙심을 이겨나간다. 성령님 안에서 말이다(5). 이렇듯 사역은 심판대까지를 보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에게는 부활신앙이 있다(1-5).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5b)

 

비록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1a)더라도, 그러니까 현재의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리더라도 사역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세 번째 사역철학이다. 실로 비장하다. 몸이 무너지더라도 낙심하지 아니하겠다는 이유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집’(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 1b,2a), 즉 부활의 몸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자는 찰나적인 것에 목숨 걸지 않는다.

사역의 길은 결코 영광과 행복만이 아닌 고난과 낙심이 공존한다는 점, 그럼에도 그것만을 보거나 그것에 휩싸여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부활의 몸(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입게 될 날이 있음을 믿고 알고 확신하고 누리는 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바울의 영성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향해 사역의 눈을 들게 한다.

이것은 자칫 너무 고난스러워서 빨리 죽고 싶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기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4)라고 부연함으로써, 쉽게 말해서 부활의 몸을 입고 싶은 것은 피안(彼岸)이나 도피(逃避)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순교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결코 낙심할 수 없는 이유는 하늘의 부활체(復活體)를 더 사모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처럼 사역 안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땅과 하늘을 동시에 보고 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사역의 질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 자신의 결단이거나 자기 확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이 그것에 대한 보증이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5, 현대인의성경) 성령님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그날까지 사역을 감당하도록 이끄신다니 놀랍고도 귀한 격려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삶은 하늘을 향해 나아감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그 과정에서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 간다. 그러나 그 끝이 부활이기에 장래의 소망은 넉넉히 두려움을 이기게 한다. “무너지면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 이를 보증하시는 성령님, ‘새언약의 일꾼’(3.6)되게 하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육신의 짐을 넉넉히 이기며 사역하기를 꿈꾼다.

   

 

그리스도의 심판대(6-10)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믿음으로 행하고 .”(6,7)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그러나 부활의 몸을 덧입는 자리까지 나아가도록 성령님이 보증을 서시면서 동행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난과 낙심을 이기며 살아가는 노정에서 항상 담대하여 믿음으로 행하”(6a,7a)는 것이 요구된다. 새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형통한 것만은 아니다. 복음의 영광이 꽃피우려면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1a)는 것과 같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이제 목표는 분명해졌다: “그래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9, 현대인의성경) ‘에 머물러 있든지(“무너지면”), ‘하늘로 떠나든지(“덧입고자”), 무엇을 하든지 주께 영광이 되는 것, 이것이 사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자칫 어느 것 하나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습관처럼 반복될 수 있음을 늘 경험해 오는 터라 마치 새가 두 날개로 날듯이 영적 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다. 이곳이 고달프다고 저곳만을 동경하거나, 저곳이 그립다고 이곳을 한스러워하고만 있다면 덧입기’(2,4)는 고사하고, ‘무너지’(1a)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여기 있어 탄식하며”(2a),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4a) 것 밖에 무엇이랴!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4.1,8,16)며 사역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10a)는 그날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루살이처럼 왔다가 그냥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 끝이 반드시 있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다. 이렇듯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요, 사역의 기초다.

   

 

부스러기 묵상

 

   “각각 선악(善惡)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b)

       

이 땅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품고 가는 것이 신앙이다.

현재의 몸’(A,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부활의 몸’(B,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10). AB 될 때 중요한 기준이랄까 핵심들은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느냐, 그렇지 않느냐다(9-10). 또한 둘째로는 이것은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10b), 그리고 셋째는, 판별과 결정의 주도권을 잡은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이렇듯 중요한 것은 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4.7a) 참으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는 말씀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위 영적(靈的)이라는 것들은 모두 육신, 그것도 현재의 몸과 더불어 함께 가는 것 아닌가. 중요한 두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영적인 삶과 분리된 영혼도 문제지만 영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서 그것이 육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것 역시 심각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장애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1)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여기에는 영적인 은사가 가득했던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육체를 왜곡하고 더럽혔는가에 대한 바울의 많은 눈물’(2.4)이 이 편지의 행간(行間)에 들어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시대의 세계관(철학)이 교회 안에 들어온 가운데 가장 해악이 되었던, 그래서 이단사상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 바로 영육이원론(靈肉二元論)이라는 못된 철학이다.

바로 떠돌이 이야기꾼(3.1)에 불과한 유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윤리적이고 복음적인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 가지고 들어온 것인데, 이것의 핵심은 육은 무익하고 영은 거룩하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영만 깨끗하면 된다는, 그래서 육신은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다른 복음이다. 다시 바울의 복음에 귀 기울이면서, 고린도교회 안에 진행 중인 영적전쟁(靈的戰爭)의 선봉에 선 바울을 보면서, 주께서 나를 향해서도 기대하시는 사역철학을 하나 둘 다듬어본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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