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신학.神學(고후 2.1-11)

20200828(묵상)

  

 

 

용서의 신학(神學)

2 Cor. 2.1-11

  

   본문 관찰

 

   편지쓰기(1-4)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용서하기(5-11)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랑과 용서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1)라는 표현의 행간(行間)에 뭔가가 있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교회에 가봐야 우리와 너희 모두가 근심’(1-3) 밖에는 거둘게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그 편지’(4a)를 썼음을 회고한다. 정작 기쁨으로 만나야 할 사이(우리와 너희)는 근심하게 되고, 사탄은 기뻐하게 된다면(2) 이것은 바른 사역이 아님을 모를 리 없는 바울이기에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4b)[고린도후서]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긴 토론(1.12-2.4)의 주인공은 고린도교회 모두를 근심하게 하는 자’(2,5a)인데 아마도 우리와 너희 모두가 익히 잘 아는 자로서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인 것 같다(6). 과연 그가 어떤 일을 했기에 모두에게 이토록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켰을까? 하지만 앞서 보낸 그 편지와 지금 쓰고 있는 [고린도후서] 사이에 이미 그는 충분한 벌을 받았고(6), 그에게 용서와 사랑이 필요할 만큼은 문제가 해결된 듯 싶다(7-10).

이로써 바울이 직접 고린도를 방문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다시 가리지 않은 것이 더 유익하게 된 셈이다. 결국 사탄의 속셈을 아는 만큼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니(11)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도록 우리와 너희의 아름다운 동역자(24b, ‘돕는 자’)됨이 감동적이다.

   

 

편지쓰기(1-4)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3b)

 

고린도교회를 돕는 자’(1.24b)로서 섬기는 사역임에도 그것이 때로 너희에게는 근심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바울은 주목한다(1). 우리의 사랑이 너희에게는 근심이 되었다니 좀 그렇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바울이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 너희 입장에서 보는 자세, 섬김의 사람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근심이 되는 거라면 기꺼이 너희를 배려하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 도리라고 입장을 정리한다(1).

너의 근심이 나의 아픔일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심령이 메아리치는 사람, 그가 바울 사도다. 사랑하면 기쁘고 행복하지만 때로는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근심이 되는 때도 많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으면 어떻게든 그 값을 묵묵히 지불하게 한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고 있다(2,4).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관계에로의 회복을 꿈꾸면서 말이다(3).

바울은 저들을 찾아가는 대신에 그 편지를 통해서 우리(바울)와 너희(고린도교회) 사이가 다시 복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바울은 말씀(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희망이다고 믿고 있었고, 그랬기에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4a)라고 당시의 심정을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변덕스럽고 가볍기 때문에 자기 기분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1.15-17)는 오해, 감히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는 말을 쉽게 할 정도로 바울의 영적 권위와 리더쉽(leadership)은 인정해 주지 않는 불손하고 교만한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근심하게 한 자’(5a)1장에서는 육체의 지혜’(1.12)로 하는 자다- 통칭되는 자를 향해 많은 눈물로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에게서 그를 변화시킨 주님이 생각난다.

사랑하는 고린도교회를 마음에 품고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을 잠시 생각해 본다.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3a)하면서도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4b)하고 싶은 바울이다. 바울에게는 가 있다. 그래서 너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드려다 볼 수 있었다.

자신 안에는 근심이 있을지라도 고린도교회만큼은 식을 줄 모르는 사랑으로 가득한 바울, 때문에 그들의 신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a)임에도 수준은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는 고린도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송가’(고전 13)를 외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지금에도 그의 가슴은 여전히 사랑으로 충만하다(4b).

   

 

용서하기(5-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11a)

 

누가 용서하며 살 수 있을까.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으로부터 부르심(calling, 9.1-19a)을 입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거듭남을 위해 지불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용서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하여 새사람이 된 용서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경험(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바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근심하게 한 자’(2,5a) 용서하고 위로’(7a,10)하는 경사도로 급속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어떻게 징계(‘벌 받는 것’, 6)가 변하여 용서가 될 수 있을까. 징계가 분명한 이유 때문에 행해진 것이라면 용서 역시 거기에 상응하는 확실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지금 문제를 일으킨 익명의 성도는 고린도교회 모두를 근심하게 한”(5b) 공개된 죄인으로 교회의 공적 징계인 권징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 또한 투명하면서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바른 결정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심하게 한 자’(2,5a)의 지금까지의 삶을 다시 되돌아보면 [권징의 원리]가 바르게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람의 과거는 근심하게 한 자로서 권징을 받았다(5). 그러나 그의 현재는 많은 사람에게 벌 받은 것”(6)과 함께, 그 이후를 우리와 너희 모두가 동의할 만큼 분명히 회개한 사람으로 새워와져 있다. 그러니 그의 미래는 용서하고 위로할”(7) 자로, 그에게 사랑’(8)을 베풀어주어야 할 자로 회복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바울의 권면은 지당하다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더 놀라는 것 하나는 바울의 섬세함이다. 바로 그 사람을 근심하게 한 자’(5a)로만 표현함으로써 그를 익명의 성도로 보호하고 있음이 죄인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또한 그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면 그에게 이미 가한 그 벌만으로도 충분하며(6), 그래서 그를 용서함으로써 그가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7b), 마침내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줄 것까지를 부탁하고 있다(8). 가히 바울다움의 한 단면인 셈이다.

   

 

부스러기 묵상

 

잘못한 자식에게 회초리를 드는 부모의 가슴에는 사랑의 눈물이 쌓인다.

회초리와 사랑, 얼른 보면 서로 극과 극을 달리는 상극(相剋)인 것 같은데 부모에겐 이 둘이 늘 가능하다. 이렇듯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에게서도 이 둘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특별히 많은 눈물’(4a)로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에게서 이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낳은 영적 자식이기에(18.1-17) 그는 부모의 마음이 되어 회초리와 사랑이라는 두 날개로 고린도교회를 목양(牧羊)하고 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차마 그대로 볼 수 없었다. 사랑 없는 권징은 숨도 쉬기 곤란하고, 징계 없는 사랑은 너무 무절제하다. 그래서 권징이라는 회초리를 들었고, 하지만 사랑의 매에 아파하며 근심하는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그게 또 애처롭고 가슴 아파 눈물 흘린다. 이게 바울의 마음이다. 너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만큼도 축복이다는 생각이 든다.

근심하게 한 자’(2,5a)의 죄에 대한 권징이 용서되고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되기까지(5-6 7-8) 그 성도는 정작 무얼 하고 있었을까. 6절과 7절 사이에 모두가 다 알 듯이 회개함이 있었다. 용서의 신학(神學)에는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죄는 없다.”는 원리가 도도하게 흐른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다리시다가 권징을 사랑으로 대치시키신다.

그렇다면 회초리(책망과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바울은 이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비록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일이지만 사랑의 회초리를 들고 고린도교회를 향해 권징의 편지를 썼던 것이다. 바로 그 편지’(3,4)가 지금 [고린도후서]와 같은 용서와 사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말씀이 가는 곳에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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