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하리로다!(고후 1.1-11)

20200926(묵상)

   

 

 

찬송하리로다!

2 Cor. 1.1-11

  

   본문 관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너희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성도, 고난과 위로 그 사이에 서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물은 위(높은 곳)에서 아래(낮은 곳)로 흐른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써 내려가는 우리의 환난이 너희에게는 위로로 전달되어 흐르게 되는 역설의 복음이 갖는 비밀 역시 그렇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6) 읽을수록 은혜가 되는 말씀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관계는 여전히 이처럼 견고하다.

이제 이 하늘의 위로가 바울을 통해 고린도교회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고통과 환난도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8-9).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내일도 위로의 넓은 팔 안에 품으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기로, 이것이 우리와 너희의 공통분모이기를 갈망한다(10). 이를 위해 중보기도는 필수적이다(11).

   

 

우리메시지

 

바울은 자신과 자기 곁의 사람들을 우리(1a)로 묶는다. 그리고 이를 다시 너희(1b),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와 성도들과 연결하는 일을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시작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를 진행함에 있어 사도적 권위나 명령과 같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 섞인 것을 통해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자신이 개척한 고린도교회가 사도권을 시비하며 바울을 거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2.17, 3.1, 10.1, 11.5,7, 18.1-17).

바울은 오직 우리와 너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으로 하나 되는 길을 찾는다(1 2-5). 고린도교회로부터 어떤 역풍이 휘몰아쳐도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너희의 인사(1-2)는 곧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3a)라는 예배에의 선언 앞으로 다함께 나아가게 한다. 이 점이 고린도후서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다시 기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 그분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4a)시는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이 바울을 붙들고 계시기에 고린도교회를 향해 사랑과 위로의 편지를 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바울공동체, 1.19)를 통해 다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4b) 그분이 너희’(고린도교회)에게 흐르게 되기를 소망하게 된다.

바울은 기꺼이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 자신의 통로가 되어 우리가 받은 한량없는 은혜가 너희에게 흘러 넘치게 되기를 갈망한다. 고난은 위로의 어머니였다(5). 고난이 단지 고난으로 끝나버리지 않고 위로를 낳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것, 이것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하며 사는 자의 행복이다.

   

 

너희멜로디

 

너희에게도 고난은 있다(6b). 그러나 너희의 고난은 다름 아닌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것이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견디어 냈듯이 너희도 이를 견디어 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식으로 왜곡시키는 일이 종종 있듯이, 고난 역시도 우리가 하면 조개 속으로 들어간 모래알 같아서 곧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결과되어질 것이고, 너희가 고난을 당하면 당연히 죄 값을 치르는 것이라는 식으로 끌고 간다면 이것은 근본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심각한 중증이다.

바울은 아무리 고린도교회가 심각한 영적 홍역을 치르고 있고, 그래서 그 불똥이 자신의 사도권 시비로까지 확대되어 자신의 영적 권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자신)와 동일한 고난을 받고 있는 너희를 향한 건강한 마음을 결코 잃지 않는다. ‘성도다움을 이루기에는 아직 까마득히 멀어있다 할지라도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7a) 고난에서 위로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너희가 이처럼 고난과 위로라고 하는 두 날개를 통해 하나되기를 원하는, 그래서 다시 함께 더불어 찬송하리로다!”(3a)를 외치는 예배에의 부르심 앞에 나아가는 그날이 오기를 원하는 바울의 간절한 소망이 물씬 풍겨난다. 너희의 고난 앞에서도 우리의 소망은 견고하다는, 즉 너희가 이 고난을 뚫고 일어설 것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가 더 없이 빛난다.

사실 고난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고난만큼 크고 센 것은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바울은 부연한다(8-10). 바울, 우리의 환난은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같이 큰 사망에서라는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생사를 넘나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었고, 이를 저희도 역시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난에 대한 간증을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환난은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9b)라는 하나님의 고난방정식이라는 교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이라는 삶의 정거장에서 만난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며 또 건져 주시리라 믿습니다.”(10, 현대인의성경)라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와, 그리고 비록 연속되는 고난일지라도 능히 이겨낼 믿음이 자라는 복을 얻게 되었다는 신앙이다.

   

 

부스러기 묵상

 

성도(聖徒)란 고난과 위로, 그 사이를 살아가는 소명자요 나그네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메시지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바울마저도 생명을 건 고난의 중심부에 서 있다. 그러니 너희멜로디의 한 음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랴. 그럼에도 고난과 위로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의 이중주를 사랑하게 되고 아름다운 영혼의 시각에서 품을 수 있게 되니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우리의 삶이라는 가락에서도 찬송하리로다!”는 멜로디가 울려 퍼지게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도 바울이 품은 너희여서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11a)

 

바울은 마지막으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우리와 너희의 아름다움 하모니, 그러니까 비록 서로가 지금 고난과 환난 가운데 처해 있지만 그 이후를 위로와 은혜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너희기도하는 일에 동참해 줄 것을(11), 그래서 함께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3a) 할 수 있게 되기를, 동시에 고난의 승전보를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10).

기도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만든다.’니 얼마나 감동적인가(11b). 성도의 기도가 흐르고 흘러 그가 영적으로 돌봐야 하는 너희들이 마침내 우리의 영적인 유산과 성숙의 자리를 이어갈 수 있다니 새삼 기도의 능력과 깊이를 생각해 보게 된다. 비록 몸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기도는 우리와 너희를 이처럼 하나(공동체, 가족)로 연결한다. 하나님은 그의 삶의 자리가 비록 너희일지라도 그가 기도할 수 있다 하시며, 그의 기도를 사용하시고 싶어하시며, 그의 기도가 우리까지를 도울 수 있다 하신다.

한편 기도는 성도의 수준과 형편과 깊이라는 것이 우선하거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기억해 본다. 비록 너희일지라도 기도할 수 있다 하시며,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말씀하신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만남이 이처럼 기도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한 공동체(교회)의 내일은 소망으로 살아난다.

기도하는 자는 아름답다. 기도하는 자는 자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수한 장애물 앞에 기도를 앞세우는 바울의 마음이다. ‘성도다움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는 그만큼 희망이다. 바울이 기도를 이처럼 품듯 우리 역시 바울처럼 기도를 바라볼 수 있고, 그래서 더 깊고 풍성한 기도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환난과 기도가 만나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환난은 기도의 무릎을 꿇게 하지만 기도는 환난을 뚫고 일어서 비전과 소명의 길을 걸어가게 한다. 때문에 환난이라고 읽고 기도라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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