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성경대로 알라!(고전 15.12-19)

20200625(묵상)

  

 

 

부활, 성경대로 알라!

1 Cor. 15.12-19

   

 

   본문 관찰

 

   전파(12,14) - kerygma

   증언(15) - witness

   믿음(14,17) - faith

   

 

죽은 이들의 부활

 

   “하나님께서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6.14)

 

부활장(15)에서 놀라는 부분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이 동선(同線)에 있다는 점, 그중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들에게 미친 은혜와 축복은 늘 생각하고 고백해 온 믿음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은 복음이다.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3a,16a)에 이어지는 답(, 13b,16b -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을 보고 읽고 묵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잔잔한 감사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적잖은 충격 같은 것을 느낀다.

우리네 신앙의 지평을 이생만이 아닌 내생까지를 바라는 것이 부활과 관련하여 잊지 않아야 할 것이자,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동일하게 선포(kerygma, 12,14)해야 할 복음이다. 부활은 단지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다. 믿는 것이고, 또한 오늘도 여전히 부활이 없다!”며 사두개인의 후예(아류, 20.27)임을 자체하는 자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부활공동체]의 일원되어짐을 감사하며 묵상 앞에 선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다면(12a)

     ―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b)

       →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3a,16a)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15b)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3b,16b)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14a)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요(14b)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b,17b)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15a)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b)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19)

 

바울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부활이 없다는 회의(불신)론자들에게 그러한 생각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논리에 담아 편지를 통해 전파한다. 이미 역사인 주의 부활(4-8)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12). 동시에 고린도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자들의 주장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라 논박한다.

먼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3a,16a) 그리스도도 결코 다시 사신 것이 없으신 것이 된다(13b,16b). 이렇게 되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그럼 과연 이런 헛된 독설을 퍼트리는 자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고린도교회가 바르게 분별하기를, 이것이 교회의 혼란을 수습하는 길임을, 바울은 이번에도 멋지게 부활 클리닉으로 역전시키고 있는 셈이다.

부활논증은 다시 더 깊은 단계로 넘어간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14a) 결과적으로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요”(14b),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14b,17b),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15a),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b),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18)는 허망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성도의 부활이 없다며 불신앙에 치우친다면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똑바로 직시하게 만든다. 결국 이런 역풍을 통해서도 부활신앙에 견고하게 세워지는 고린도교회가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바울이 탁월한 목회자인 것은 단순한 안타까움에 따른 감정적이고 일회성에 가까운 책망이 아닌, 하나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그 근본 배경과 원인을 드러내고 치료함으로써 더 깊고 풍성한 신앙에로의 성장과 성숙까지를 목표한다는 점이다.

   

 

부활의 증인들

 

   전도(1.21, 2.4, kerygma) - 선포의 행위에 초점

   전파(12,14, kerygma) - 선포의 내용에 초점

   증거(15, witness) - 부활의 사실의 확증에 초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전파(kerygma, 12,14)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증거(witness, 15)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참 증인으로 판명될 것이기에 중요하다. , 전파와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게 되었다는 역사적 부활에 기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와 사도들은 오직 부활!’을 전파하고 또 증거 하는 증인의 일에 생명을 걸고 헌신했던 것이다(1.8, 2.32, 3.15, 5.32, 10.39,41, 13:31). 결국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대단히 긴 논증을 하고 있는 것도, 교회의 기초는 부활하신 주님에게 있고, 따라서 교회는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공동체라는 흔들 수 없는 정체성 때문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세상의 사교클럽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것이 19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비록 부활의 사실을 아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활신앙을 낳는 것은 아닐지라도 부활신앙은 주님의 역사적 부활을 전파하는 것에 의해 듣게 되고, 그 들음에서 믿음이 생기기에, 사도들은 복음의 전파에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10.13-15).

   

 

부스러기 묵상

 

부활의 복음은 부활주일에만 쓸 기념사(축사)가 아니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다른 때는 몰라도 최소한 부활주일만큼은 주님의 부활을 전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 않다. 내가 복음을 듣고 믿음이 들어가 주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부활의 첫 열매’(20)가 되사 마침내 당신의 부활에 나를 함께 참여케 하신 이 놀라운 복음을 전파하는 일, 이게 어찌 맛있는 식당이라고 자연스럽게 선전하는 것보다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안에 잠자는 부활의 복음을 다시 깨워야겠다. 도대체 부활이 없다!”어떤 이들도 사탄의 휘하에서 간첩 노릇을 목이 터져라 하고 있다. 그런데 부활이 있다!”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소식을 전파하는 자로서 이처럼 무덤덤해서야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세우는 부활을 사랑하는 당당하고 떳떳한 영적(靈的) 군사라 할 수 있겠는가.

먼저 감사할 일은, 부활이 안 믿어지지 않는 게 감사하다. 이 신앙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이기를 기도한다. 비록 사도는 아닐지라도 사도적인 사명을 주님과 교회로부터 부여 받은 자로서 부활의 주님을 전파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기를 갈망한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주님의 부활을 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아야만 한다.

단순히 강단 언어로서의 부활을 말하거나,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부활을 하나의 예화로 사용하거나, 연래 행사에나 사용하는 양념처럼 슬쩍 끼워 넣는다거나, 부활의 사실을 전파하는 것보다는 그것의 의미나 가치만을 우선시함으로써 역사적 부활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나부터 먼저 [부활복음]을 성경대로 알고 믿고 확신하고 전하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인 사명을 수행해야겠다.

나를 부활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고 싶다. 주님처럼 나도 언젠가 부활체(復活體)를 입을 그날이 오고 있다. 주님 부활이 있었기에 주님 재림 이전에 내가 죽는다면 나 역시 주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영광스런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바로 그날 부활이 없다!”며 건방을 떨던 자들이 받을 충격을 상상하면 불쌍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 가지를 더 곱씹어 본다면, 사도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의 삶에 생명을 걸었다. 나 또한 목사라면 부활이 없다!’며 깐죽거리는 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보다는, 바울처럼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이처럼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소명에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이 부활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나의 부활간증이다.

우리는 어제 밤 잠자리에 들었다가 오늘 새벽에 눈을 뜨고 일어난다. 이곳에서 눈을 감지만 저 곳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는 일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죽은 자의 부활 역시 이럴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 끝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이 조금 더 가까이 오고 있는 시간표를 받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죽음 끝 너머에 다시 영원히 사는 부활이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며 살 수 있다. 오늘 한 날이 주 안에서 그런 날이다.

 

 

제목 날짜
부활, 성경대로 알라!(고전 15.12-19) 2020.06.25
이혼에 대한 교훈록(고전 7.10-24) 2020.06.11
사도의 정도목회.正道牧會(고후 12.11-21) 2020.10.08
교회가 희망이다(고전 3.10-23). 2020.06.06
사도의 고난 자랑(고후 11.16-33) 2020.10.0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고전 10.23-11.1) 2020.06.16
우리고백록2(고전 4.14-21) 2020.06.07
고린도전서 맥잡기 2020.05.31
사도권, 오해와 변호(고후 10.1-18) 2020.10.07
바울 사역의 특징들(고후 6.1-10) 2020.09.29
용서의 신학.神學(고후 2.1-11) 2020.09.28
지식인 vs 사랑인(고전 8.1-13) 2020.06.13
찬송하리로다!(고후 1.1-11) 2020.09.25
인고신위론.人苦神慰論(고후 7.2-16) 2020.09.30
사도직③ - 그 사역철학1(고후 4.1-6) 2020.09.29
사도직③ - 그 사역철학3(고후 5.1-10) 2020.09.29
사도직① - 그 기초(고후 3.1-6) 2020.09.28
송사(訟事) 클리닉(고전 6.1-11) 2020.06.09
갈등은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고후 1.12-24). 2020.09.26
헌금하기2 - 관 리(고후 8.16-24) 202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