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종이었으나 이제는 아들이다(갈 4.1-11).

20210908(묵상)

 

 

 

그때는 종이었으나 이제는 아들이다.

Gal. 4.1-11

 

    본문 관찰

 

    신분 이동(vs 아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법적 지위(1-7)

       유대주의를 경계하라(8-11)

          ‘그 때에는’(8)

          ‘이제는’(9)

  

 

vs 아들

 

율법이냐 믿음이냐?”(3-4)의 문제를 다루는 중이다.

바울은 앞 단락(3.26-29)의 연속으로써 ’(A)에서 아들’(B)로의 신분 이동을 갈라디아교회에 적용한다(1-7). 여기에는 그 때에는’(A, 8)에서 이제는’(B, 9a)으로 이미 신분이 변화되었기에 다시유대주의자들의 농간에 휘둘리지 않기를 바라는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녹아있다(8-11):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세상의 유치한 교훈; 새번역)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b)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법적 지위(1-7)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때가 차매’(4a)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아들됨은 율법과 무관하게 이루어진 사건이다. 이것은 때가 차매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서다(4).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셨다(5). 이것이 아들의 명분을 얻게, 즉 양자(養子)됨이다. 또한 그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주셨다(6). 이렇게 해서 아들됨과 유업을 받을 자’(상속자)가 되었다(7, 3.29).

   

 

유대주의를 경계하라!(8-11)

 

    ‘그 때에는

       ↔

    ‘이제는

 

양자와 상속자가 된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권 안에 있게 되었다면 율법의 지배하에 있었던 그때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만 한다(8). 왜냐하면 이제는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물론 하나님의 아신 바 됨이라는 신지식(神知識)에 참여하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9a).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예한 자는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9b).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은 이제는에서도 그 때에는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이다. 이게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충격은 이렇듯 이미 너희’(갈리디아교회)가 다시 율법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는 점이다(10). 은혜의 복음 안에서 아들(양자)됨과 유업을 이을 자(상속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다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율법의 지배 아래로 되돌아가 버렸다(11).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의 속임수(다른 복음, 1.6-10)에 넘어간 것 같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동시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증표(sign)인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갈라디아교회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영적(靈的) 혼합주의라는 다른 복음이야말로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도전이었다(10). 이것이 갈라디아교회를 걱정하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다(11). 다시 율법의 행위(노예)로 돌아가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아들됨 이후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상속자, 3.29)이 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참예하는 것으로부터다. 이것이 정한 때’(2) 때가 차매’(4a)가 갖는 구속사적 위치다. 율법은 이를 위해 전적으로 무능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 안에서 시작되고 열리는 새로운 시대, 이것이 이후에 펼쳐질 하나의 그림이다.

여전히 율법의 그 때에가 복음의 이제는을 헛되게 하려 한다. 다시 율법(할례, 행위)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렇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2.21). 성령 안에서 받는 고난과(3.4),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3.17), 그리고 복음을 위한 바울의 수고를 결국 헛되게 한다. 바로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삶에서 망하게 하는 다른 복음의 무서움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만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려는 것은 다른 복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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