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문제 안에 해답을 본다(고후 13.1-13).

20201013(묵상)

   

 

 

사도, 문제 안에 해답을 본다.

2 Cor. 13.1-13

  

   본문 관찰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전에 죄 지은 자들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형제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12.19b)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11a)

 

바울에게 있어 고린도교회는 여전히 형제.

아직 그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말이다(1, 12.14). 바울은 이미 내가 다시 가면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12.21)- 용서하지 아니하리라.”(2b)고 최후통첩(最後通牒)을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모든 성도에게”(1.1)로 시작하여 형제”(11a)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저희를 온전하게 하려는 아비의 마음, 그 안에 답이 있다(7,9).

   

 

아직은 회개의 기회가 남아있다(7).

 

바울이 끝까지 고린도를 자신의 심령 안에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7) 바울은 말씀을 통해 교회가 성결과 순결을 유지하는 것의 최종 권위를 하나님 편으로 돌려드리고 있다. 하나님보다 앞서 권징을 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혹 불가피하게 그렇게 되기 이전에 먼저 아직 회개하지 않은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사랑의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수납하게 되기를 바라며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세 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하기 이전까지가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만들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바울을 비난하는 무리들에게는 회개의 기회이자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삶으로 회복될 수 있는 남아있는 시간들인 셈이다. 이렇듯 문제 안에 해답이 있음을 가르쳐준다. 이게 고린도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본다. 방주가 지어지는 120년 동안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기간임과 동시에 방주가 완성되는 날, 그러니까 이 기간은 심판의 날은 점점 임박하고 있다는 이중성을 갖는 기간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를 방문하기 이전까지 남아 있는 기간 역시 그렇다. 이 기회의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바울은 중보기도하고 있다(7,9).

 

   “구하노니 구하니 ”(7,9)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악을 행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바울은 남은 시간이 고린도교회에 이처럼 회복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바울이 이처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의 기도생활에서 비롯된다. 바울은 아직 남아 있는 회개의 기회를 저버리지 않도록 기도한다.

생각해 보면 인간적으로 참 미운 사람들이 아닌가. 끝까지 자신의 사도권과 정직성을 의심하며 비난하는 무리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저들을 위해 중보기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누가 기도의 은혜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인가. 자신을 미워하고, 헐뜯고, 비난하고, 곤경에 처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비슷한 교훈을 로마의 성도들에게도 한 적이 있다. 로마서 12장으로 가 보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4,19-21)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넉넉히 품을 정도로 넓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 능력은 그의 끊임없는 기도에서 비롯된다. 기도는 이처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죄인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사실 기도는 너(고린도)를 변화시키지 전에 나(바울)를 바꾸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기도하면 바로 그 사람을 새롭게 하시사 하나님의 시각에서 문제를 보게 하신다.

 

   나의 기도를 정직하게 되돌아본다.

   ▪나는 바울처럼 반대자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기도하는가?

   ▪나와 바울의 기도가 차이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는 싸움의 대상을 바꾼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이처럼 영적 혼돈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이 바로 죄악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기도는 영혼을 보게 만든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죄악 가운데 노출된 고린도 성도들의 악한 영혼을 기도로 품는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악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악을 행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악을 악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태도, 그래서 그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뜻대로 해결하려는 유혹을 일찌감치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일을 섭리하시는가를 주목하기를 원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주님처럼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다.

바울은 기도의 은혜와 축복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기도의 능력 밖으로 밀려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는 두 번 승리하고 있다.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에서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그는 넉넉히 승리해 낸다. 그 승리의 근원이 기도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다시금 기도 앞으로나아감이 행복이요 보람임을 깨닫는다. “기도하는 한 그는 이미 승리한 사람이다.”는 사실을 다시금 조용히 되새겨본다. 기도! 할수록 그 안에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2)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1.1b)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1-12)

 

아마도 세 번째 만남(1, 12.14)이 있기 전에 편지는 배달되었을 것이다.

공은 고린도교회로 넘어갔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새롭게 결단할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지만 전혀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2). 하지만 어떤 경우든 그 책임은 모두 고린도교회의 몫이다. 그래서 긴장이 있다. 하나님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을 주신다. 그것만큼이 은혜요 기다림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못나디 못난 고린도교회를 이렇듯 사랑으로 품고 있는 바울에게서 나 또한 그처럼 교회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품고 가야겠다는 내 몫의 그림을 그려보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만으로는, 내가 선호하는 스케치만으로는 이제는 한계에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늘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보지 못했음 또한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그림은 내 맘대로 그릴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나를 바꾸고,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 드러내고 그려내는 것, 이것이 고린도교회를 순례하면서 바울에게서 듣는 귀중한 교훈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희망의 그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마지막까지 어떤 이들’(12.16)과 두 번째 대면(2)이 가져다 준 쓴뿌리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들아!”(12.19b), “형제들아, 기뻐하라!”(11a)로 고린도교회를 넉넉하게 품는다. 이렇듯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쓴소리들은 다 사랑의 채찍이었던 셈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11)

비록 고린도교회의 오늘은 그리 희망 있어 보이지 않다. 누구보다 바울이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기도(7,9)와 더불어 다시 만난 날의 희망을 든든히 붙들고 있다(10). 그러니 끝인사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11a)- 또한 소망의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본다: “형제들이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11)

이런 희망의 아침과 함께 고린도교회와의 세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바울의 심령 안에는 가득했을 것 같다. 어쩌면 반드시 그날에 올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도(祝禱, 13)로서 이 서신을 마무리한다. 진실로 이 축복 안에서 고린도교회가 살아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지난 20029월에 고린도를 잠시 방문했을 때 [바울의 설교단]이라는 푯말 앞에서 그가 몹시도 그리웠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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