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정도목회.正道牧會(고후 12.11-21)

20201012(묵상)

   

 

 

사도의 정도목회(正道牧會)

2 Cor. 12.11-21

  

   본문 관찰

 

   사도권 변론에 대한 결론(11-13)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자비랑 사역 원칙(14-18)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세 번째 방문 예고(19-21)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내가 갈 때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위기는 곧 기회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복된 시기와 힘겨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참 사도를 구별하는 온갖 표적들,

    곧 놀라운 일과 이적과 능력의 표적들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나나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교회들에 비해

    덜 받은 것이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바로 내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은 것 말입니다.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그 책임을 빼앗은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12-13, The Message)

 

바울은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쪽에 선다.

오히려 바울은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을 위해 많은 설명을 부연해야 했다. 왜 그래야만 할까?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언약한 상황이고, 그래서 아픔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처럼 취급당하면서까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한 변함없는 애정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11-13).

바울은 간교하게 속임수로 고린도교회를 착취했다(14-18).

 

먼저,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은 목사가 아니다.”는 비난에 대한 바울의 변명이다(11-13). 고린도의 일부 사이비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추천서가 사도의 증표임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3.1). 이 추천장이 없으면 사도가 아니라고 몰아붙였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에 복음을 처음 심은 사람이다(고전3.6). 그러니까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처음으로 들었다. 바울을 통해 주님을 알았고, 성령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각종 은사를 받았다. 문제도 많았으나 그 문제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특별한 사랑을 더 많이 받았던 교회였다. 분명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복음의 열매다. 그런데 그 교회가 이제는 오히려 바울을 거부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 어찌 된 일인가?

또한 쉽게 말하면 바울은 삯꾼이다.”는 비난이다(14-18). 그는 목숨까지 내어주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가장 치명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에 의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실상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15) 주었음을 상기시킨다.

처음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바울이 이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것만큼 그가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안심이 된다.

사실 내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은 바울 대적자들의 다른 복음’(11.4)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이처럼 취급당하는 것은 관심 없고- 바울처럼 취급당할 경우 우선 내가 아프고 고통스러워 자존심 상하기 때문이지 싶다. 그렇다면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피하고, 복음 때문에 대접받고 그럴 듯하게 사는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나 또한 언제든지 고린도교회 일부 사이비들처럼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질 않는가.

어느덧 고난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 없는 복음, 복음 없는 영광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부끄럽고 황송하다. 바울처럼 살 수는 없을까.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바울 되게 하고 있는가. 바울처럼 살고, 바울처럼 사람들을 보고, 바울처럼 현상들을 분별하고, 바울처럼 풀어갈 수 있는 영적 실력, 그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는다.

 

   나는 복음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무엇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내가 무엇 사용하기를 기대하시는가?

   주님과 나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비난하는 이유가 있다(19-21).

 

바울은 여전히 고린도교회를 염려하고 있다. 교회는 그를 비난하지만 바울은 교회를 염려한다. 바로 여기가 묵상이 필요한 부분이다. 교회를 향한 거룩한 부담과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계속해서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아직 영적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이다(20). 고린도교회는 여전히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당파 싸움과 비난과 험담과 교만과 소란이 있는 교회다. 이 정도의 영적 수준이면 바울이 바울로 보일 턱이 없다. 무릇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사물을 본다. 그 사람의 언행은 그 사람의 영적 수준이다. 한 사람의 영적 실력은 그 사람의 언행을 넘지 않는다.

둘째, 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 가운데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다(21). 그래서 바울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면 교회의 권징(징계)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나 아직 육신에 속한 옛 성품을 버리지 않는 일단의 무리들이 교회 안에 어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많은 경우 교회의 문제는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사욕을 따라 살기를 고집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죄는 회개를 거부하게 만들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거룩과 의에 대항하는 편을 택한다. 죄는 자기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거룩과 싸우는 편을 선택한다. 이것이 죄가 무서운 이유이다.

   

 

부스러기 묵상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19b)

 

복음이 바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사람으로부터 거부를 당할 수 있어도, 그래서 그것이 때로 고통과 고난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어도,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결과적으로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할 풍성한 것들을 놓치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만큼 영적 전투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고난과 고통은 그것대로의 몫으로 아프게 맛보게 되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바로 그 안에 일어나는 거대한 영적 전쟁을 실패케 만드는 쪽으로 작용하도록, 그래서 결국 상처뿐인 영광이 되게 해 버린다면,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고난과 시련, 그것 좋다. 하지만 그것들 때문에 복음이 복음 되는 것까지를 놓치고 있다면 그것이 더 큰 시련이 아닌가. 바울은 멋지게도 이 둘 모두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상대하고 있다. 그래 오늘도 바울에게서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와 못난 성도들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정을 가지고 목회하는 그 영광스런 목양을 포기하지 않는 바울이다.

 

   이처럼 바울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바울이 실패하는 것을 막아내고 있음을,

   바울이 바울 되는 은총의 중심에 여전히 일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인하여,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나 역시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나 또한 바울처럼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은혜를 맛보게 하옵소서!

   주님이 나를 복음으로 말미암아 목회의 거룩함으로 부르셨사오니,

   나에게 허락해 주신 사역 속에서,

   조그마한 부스러기라도 드릴 수 있는 은혜를 감당케 하옵소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무엇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하사

   주님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는 거룩한 행진이

   내 안에도 시작되는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목회의 심정을 주시옵소서!

   주님, 나에게도 바울과 같은 목회의 심장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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