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고난 자랑(고후 11.16-33)

20201010(묵상)

   

 

 

사도의 고난 자랑

2 Cor. 11.16-33

  

   본문 관찰

 

   내가 조금 자랑하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왜 갑자기 자랑인가?

 

고린도교회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랑의 수준을 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버렸기 때문이다. 저들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지껄이는 헛되고 무가치한 자랑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바울에게 더 급하고 우선적인 것은 고린도교회가 유치한 자랑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어리석음까지라도 용납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고(1,16), 이럴 수 밖에 없음이 바울 자신의 심정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달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고난과 교회를 위한 염려를 동일시할 정도로 교회 사랑에 남달랐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할분명한 이유 있음을 고백한다(31). 참으로 멋진 신앙하기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그의 자랑이라는 것이 부득불, 약한 것, 고통과 고난, 그것도 최소한의 것들만으로 제한되어 있다. 자랑하기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너희(고린도교회)와 저희(적대자)가 들어야 할 복음이다.

   

 

웬 자랑하기?(16-21,28-31)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

 

고린도교회 구하기라는 대()를 위해서는 바울 자랑하기라는 소()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16-18). 그래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고, 역시 그래서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라고 말한다. 결코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랑이라면 본시 위대하고, 박수를 받을 만하고, 대단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의 자랑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자주 받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 바울이 고린도교회 구하기를 위해 왜 자랑하기라는 맞불을 놓아야만 하는가? 이것이 바울의 자랑편이 갖는 핵심이다. ‘여러 사람’(18a)으로 지칭되는 자들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영적 순수성을 흐리게 만든 다른 복음’(4)을 전한 유대주의적 분파주의자들이다. 바로 이렇듯 복음과 다른것들이 들어오면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자랑의 본질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영적 균형을 잃고서 저들의 속이는 가장’(假裝,13-15)에 그만 놀라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저들은 헛된 것을 자랑하였다. 예를 들면 신분과 수준이 맞지 않는 추천서라든가(3.1), 남의 수고를 가로채서 분량 밖에 자화자찬하는 것(10.12,15), 율법이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기초로 한 예수 무당처럼 행세하는 것(4),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육신을 따라 자랑하”(18a), 그리하여 고린도교회가 사탄의 노리개가 되도록 만든 요인들이다. 불행하게도 고린도교회는 저들의 악한 계략을 순진하고 순수하게도 그만 용납’(20-21)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이 어리석은 말이나마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21b,30) 자랑하게 됨을 정중한 어조로 양해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자신의 마음은 늘 무거웠다고 말한다(28a). 그것은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때문이다(28b). 그는 한시도 가슴에서 교회를 품지 않고 지내는 적이 없었다. 놀랍게도 자신과 교회를 동일시하고 있을 정도다(28-29).

바울은 이런 [양해각서]가 고린도교회에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사탄의 일꾼’(13-15, 대적자)들이 더 이상 교회를 농간하지 못하게 되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31a)을 이런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바라보고, 또 입으로 시인하며 찬양한다. 이것이 주 안에서 자랑”(10.17)하는 자의 삶이다.

   

 

고난행전(22-27,32-33)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9.16)

 

바울의 고난은 참으로 눈물겹다. 헛된 자랑을 늘어놓는 저희와 겉모양은 같아 보이지만 저들은 비슷하고 교묘하게 가장’(假裝)한 무리들일 뿐이다(22-23a). 분명한 것은 저희에게는 고난이 자랑인 바로 그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내려가는 것은 없고, 바울이 뿌리고 가꾼 고린도교회의 열매를 자신들의 것인 냥 도적질한 것이 저희의 실상이다(10.12-16). 그것도 모자라서 고린도교회를 등에 업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화자찬만 늘어놓고 있으니 참으로 불행한, 그래서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15b) 될 자들이다.

이런 고난의 여정 가운데서도 오직 복음!’이라는 일념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해 하는 바울이 더없이 커 보일 수가 없다. 그는 고난을 피하지 않았다(20.23).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도 아무런 표시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주님의 남은 고난을 몸소 채웠다. 누군들 고난받기를 좋아하겠는가. 바울이라고 어찌 유혹이 없었으랴. 그는 위대한 사도행전을 고난행전으로 마무리할지라도 여전히 복음과 함께 살아간다(28.30-31).

   

 

부스러기 묵상

 

   “누가 약해지면 내 마음도 약해진 기분이었고

    누가 죄를 지으면 내 마음도 아팠습니다.”(29)

 

부득불 자랑할 수 밖에 없는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 본다.

그것도 최소한의 것들만을, 더더욱 약한 것들만의 자랑하기 앞에 서 있는 바울의 마음이 조금은 느껴지는 듯하다(너무 감상적인 분위기로만 끌고 왔거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누구를 위한, 무엇 때문에, 왜 이토록 슬프고 시린 삶의 멜로디를 따라 살아야만 했을까. 그럼에도 기뻐하고,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을 부르며 살 수 있었던 비밀, 그 흔적(stigma)을 내 삶으로 다시 재현해 보고 싶다.

좁쌀 같은 마음으로는 비슷한 흉내도 낼 수 없는 깊고도 먼 간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바울닮기가 가능한 양 그의 심장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부끄럽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이어서다. 필시 바울처럼 살라시면 저 멀리 도망가 버릴 것이면서도 마치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처럼 가장’(假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사역자의 길이 영광이라 받아들이며 사는 이 설명할 수 없는 역설의 복음이 좋기만 하다.

끊임없이 자기는 부인하고, 그 공간만큼을 이웃과 성도들을 품고 사는, 그래서 너의 열기에 따라 나의 온도가 느껴지는(29), 그곳이 바로 주께서 맡기신 목양의 트락이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단지 이는 바울이야기이다로만 치부해 버리지 않고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 읽을 때마다 바울과의 간격 때문에 회개할 수 있는 겸손한 삶이었으면 싶다. 우리의 고난과 고통이 교회와 성도의 유익이라면,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이 한 몸 주의 제단에 드리며 살자. 어차피 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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