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그 이후, 중요하다(고전 10.1-13).

20200615b(묵상

 

 

 

구원 그 이후, 중요하다.

1 Cor. 10.1-13

  

   본문 관찰

 

   출애굽 모형론(typology)

     구름 아래 있고(13.21)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14.21- )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만나, 16.4,14-18)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17.6, 20.7-13)

     우상숭배 하는 자가 되지 말라(32.6)

       우리는 저희와 같이 ○○하지 말자

       그런즉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출애굽 역사의 교훈

 

왜 갑자기 출애굽에 대한 회고록(回顧錄)이 등장하는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1)라고 말한다. 그럼 무엇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광야에서 그만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기시킴으로써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말도록 교훈하기를 원하고 있다.

지금 고린도교회의 위기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의 위기가 바울에게는 동일하게 보여지고 있다. 이것이 바울이 진단하고 있는 문제투성이인 고린도교회의 실상이다. 분명 고린도교회는 큰 위기 국면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의 역사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현재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이요 경계라는 바울의 통찰은 정확하다(6,11, 9.27).

출애굽의 역사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스라엘은 애굽할 때 구름기둥을 통한 초자연적인 인도와 보호를 받았다(13.21). 홍해 바다를 육지와 같이 건넘으로써 기적적인 구원을 얻었다(14.21-22). 마침내 이스라엘은 모세와 함께 하나님을 믿었다(14:31).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초자연적인 음식인 만나를 먹었으며(16.4,15), 마른 땅 광야를 지나면서 기갈이 아니라 물을 마셨다(17.6).

그러나저희는 광야에서 멸망을 받는다. 이것이 오늘 본문 앞에서 당혹스러운 부분이다.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출애굽의 역사에 대한 바울의 모형론적(typological, 1-4) 해석 때문에 더욱 그렇다. 바울은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로, 만나를 성만찬으로, 반석에서 물을 마신 것은 예수님의 생수로 각각 재해석한다. 이러한 엄청난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상숭배, 간음죄, 원망과 불평을 거침없이 토해냈다(7-10). 그 결과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는다(5). 과연 이들의 실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고린도교회(‘’)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9.27b)

 

 

시험 없는 인생은 없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시험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성만찬에 참여했다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먹었다고 해서 시험이 없거나, 혹은 자동적으로 그것을 이기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바울은 이 문제 해결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서 찾는다(1-5).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권리를 절제하며 살았지만(9.12,18), 그러나 자기 영혼을 부지런히 돌아보는 일에 실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9.24-27). 천국 상급을 얻는 특권을 상실하게 되는, 그러니까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27)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을 포함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으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곧바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론한다. 그는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지적함으로써 고린도교회가 현재 당면한 시험들이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 노정과 같음을 보여준다.

하나의 핵심은, 홍해를 건너는 것(세례 받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1-2)는 통찰이다. 홍해를 건넜어도 시험은 있다.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어도(6:3-4) 시험은 있다. 세례를 받았으나(=출애굽을 했으나, 홍해를 건넜으나) 우리는 여전히 광야와 같은 세상을 통과해 간다.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장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광야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노출된 가능성을 가지고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지금 고린도교회가 그러하다. 얼마나 귀중하고 복된 은사와 은총을 받은 교회인가. 동시에 얼마나 위기의 때를 지나고 있는 교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나도 그렇게 된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 바울의 진짜 영적 위기감은 927절이 아닌가. 101-4절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가나안의 상급을 받는 것에는 버림이 되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아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홍해에서 살려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순종하며 걸어가면 가나안의 상급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자들만의 몫이다.

우리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과 연합하는 영적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사람들, 오늘도 세상과 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은 사람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 말씀을 들으나 곧 말라버리는 사람들, 예수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교회를 이간하는 사람들, 비진리를 전하는 사람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내가복음의 사람들, 하나님의 교회를 훼방하는 사람들, 그들은 가나안이 보이는 그 앞에서 다(all) 죽을 것이다(14.29-33). 결코 가나안의 상급을 받지 못한다. 이것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통찰해야 할 소중한 교훈이다.

 

 

시험은 이길 수 있다.

 

시험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13). 바울은 다시 고린도 성도들을 격려한다. 그것은 피하지 못할 시험은 결코 닥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시험과 시련, 그리고 영적인 위험은 반드시 있다. 시험이 있는데 없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바울은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받았던 시험에서 취해야 할 교훈을 발견한다. 바울의 계속되는 권면을 들어보자.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6,11-12)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 삼아야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급에서 멀어지는 구약의 반복을 하지 않기를 권면한다. 우리 역시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가.

감당 못 할 시험은 없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3) 하나님은 시험은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그것은 시험이 없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피할 길을 주심으로 말미암는다.

주님은 나보다 먼저 모든 유혹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유혹 받는 나를 도우실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문제를 이렇게 교훈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 고린도교회는 그 옛날 광야에서 실패했던 선조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다음 몇 가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먼저, 시험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나의 시험을 아시며, 충분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나는 시험을 당하지만 주님은 그 시험을 이기도록 하신다. 능히 감당하도록 하신다. 또한 피할 길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주님 없이 홀로 시험 앞에 서있다는 어리석음을 버리자. 그리고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시험을 하나님이 도우실 수 있도록 맡기자.

또한 기도는 시험을 이기게 한다. 무엇이 내가 만난 영적 시험인가를 깨닫게 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6.13, 26.40-41)

내가 당하는 많은 시험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느 때냐면 바로 기도할 때 문제가 되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하는 많은 시험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로 시험을 미리 예방하자.

기도하면 담대해진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 안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를 실패하게 만들려고 기회를 노리는 시험들, 천국 상급의 경주에서 탈락하게 만드는 시험들, 시험은 커 보이고 나는 지극히 왜소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연약함에 머무르도록 더 이상 패배감에 빠져있지 않아야겠다. 기도하자. 그러면 담대해진다. 내가 시험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이기게 하심을 목도하도록 말이다.

시험이 아예 없도록 기도하지 말고 시험을 이기는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잘못된 기도 가운데 하나가 시험이 없게 해 달라는 기도다. 시험이 없으면 승리도, 성숙도, 감격도, 영광도, 축복도 없다. 시험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험 앞에 항복해 버리는 나약한 나 자신이 문제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은 때때로 시험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선물을 통해 나를 훈련시키신다. 때문에 나는 시험을 통해서 얼마나 내가 연약한 존재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나의 한계가 어디인가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자리가 좌절의 자리가 되지 못한다. 시험은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시험을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시험 뒤에 있는 복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시험이 오면 적극적으로 이렇게 받아들이자: “하나님이 또 일을 시작하셨구나. 이번에는 어떤 복을 주시려고 하실까. 기대해 보자!” 성경에 등장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시험을 받았으며, 그 시험을 통해 부쩍부쩍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험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받았다. 시험은 또 하나의 축복의 기회다. 시험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비밀을 알고 확신하는 사람은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험 앞에 불평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지 의문을 제기하고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시험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도록 하자. 시험만 보이면 실패한다.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통찰하자. 거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시험은 내가 얼마나 약한 사람인가를 깨닫도록 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 시험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가를 체험하도록 만든다.

시험에는 뜻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만나 통과해 가고 있는 시험은 그것만큼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이고, 또한 이미 이기게 하신 승리를 거두는 하나의 추수일 수 있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시험이 아니라 승리하게 되어 있는 시험을 통과해 가고 있음을 주목하자. 그렇다면 오늘부터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시험에 대한 나의 태도(시각, 자세)를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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