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聖徒)입니까?(고전 1.1-9)

20200601(묵상)

   

 

 

성도(聖徒)입니까?

1 Cor. 1.1-9

  

 

   본문 관찰

 

   인 사(1-3)

    하나님의 교회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감 사(4-9)

    감사하노니 책망할 것이 없는

    풍족하므로 부족함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성도(聖徒)라 불러주시다니

 

   바울의 목회자(牧會者)다운 절제가 눈에 띤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다른 어느 교회보다 책망할 것’(8)이 많은 교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2a)임을, 자신은 고린도교회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4)하고 있음을, 동시에 저희의 감사목록들’(5-7)을 열거하면서 주께서 끝까지 굳세게 해 주심으로써 마침내 책망을 넘어서는 교회가 되기를 격려하고 있다. 바울이 본 고린도교회는 이렇듯 감사와 책망이 두 사이에 끼어있다. 그럼에도 주께서 저희를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8)들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이다.

이것이 사랑에 기초한 책망을 토해내기 전에 감사하기 앞에 선 이유다. 왜 그럴까. 십자가 복음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못남과 연약함을 능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십자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못남을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십자가 피 묻은 복음은 우리의 악함과 못남과 죄와 허물보다 더 강하고 위대하다. 이것을 믿고 확신하는 것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품을 수 있었다. 이게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다.

  

 

인 사(1-3)

 

고린도교회를 향해 다시’(5.9)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바울,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얼마 전 써서 보낸 편지가 오해되고 있는 것도 있지만(5.9), 그러나 이미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달라지지 않은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3.1-3), 여기에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구구한 뒷얘기들(4), 그럼에도 말의 지혜’(1.17,18-2.16, 3.18-23)를 따라 분쟁과 파벌로 점차 골이 깊어가는 교회(1.10-12, 3.3, 11.18),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2a)를 바라보는 바울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

그는 교회(성도)를 향한 마음(태도)은 흔들리지 않는다. 비록 수준(성숙)은 아닐지라도 신분(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교회’(2a)이기 때문이고, 또한 [아직](not yet)은 이 둘 사이에 불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교회)[이미](already)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2a)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비록 상처와 문제 덩어리이지만 바울(‘우리’)은 주의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저희’)를 편지로 찾아간다. 이것이 목회자 바울에게서 배우는 목회행전(牧會行傳)의 또 다른 맛이다.

 

 

감 사(4-9)

 

   ‘감사’(4)책망할 것이 없는 자’(8)로 세워져가기를 기대하는, 이어질 책망에 자리한 바울의 넉넉한 마음을 읽게 만든다. 이러한 두 리듬은 고린도전서가 마무리되는 부분까지 이어진다. 당근과 채찍의 절묘한 하모니라고나 할까. 무릇 지도자는 겉푸름’(감사)만이 아니라 속푸름’(책망)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하고, 비록 그 과정에서 이 둘의 불균형을 발견한다 할지라도(知的) 그럼에도 균형을 잃지 않는 탄탄한 절제(意志的)에 따른 감정의 완급을 조절할 수 있어야만 한다(情的).

아무리 좋은 이야기(충고)도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의 공감과 신뢰(인정)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에 내 하고 싶은 이야기만 잔뜩 쏟아 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더 그렇다. 더욱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고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닌 편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울은 지금 저들의 행실을 준엄하게 꾸짖는 도덕교사가 아니다. 비록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 모인 교회이기를 기대하지만 바울의 기대에 턱없이 함량미달이 저희의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 항상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4b)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진실이며,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인사를 그대로 신뢰했을 것이다. 이런 영적인 신뢰 없이는 책망은 한갓 울리는 공허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비록 교회다움이라는 저들의 수준은 젖을 먹는 어린아이이지만(3.1-2), 저들의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2a)이라는 신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때문에 그가 비록 바울이라 할지라도 결코 이를 깔보거나 무시할 수 없고, 또 이 부분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하나님 편에서의 선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무릇 신분에 걸맞지 않는 수준은 뭐라 말 할 수 있어도, 수준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신분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의 교회’(2a)이며,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하게 하기 위해 불러낸 자들이다(9). 바울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았기에 그는 책망에 앞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하나 둘 고백한다(5-7). 하지만 이 감사는 주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굳세게 하여 주실 것에 기초한다(8). 이것이 분위기는 긍정적인 논조인데 갑자가 책망(8)이라는 씨앗이 뿌려진다 할지라도 안심할 수 있는 불변의 기초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의 교회(2)

    그리스도의 나타나심(7)

    그리스도의 날(8)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9)

 

잠시 고린도교회의 입장에서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편지를 통해 바울(주님)의 마음을 읽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들자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이 편지를 진심으로 받아주기를 기대했듯이 주님은 지금 내게도 이 편지를 주의 말씀으로 받고, 듣고, 읽고, 깨닫고, 그리고 그말씀 대로 준행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고린도교회의 어린아이스러움(성인아이)에도 불구하고 주님(바울)거룩하여지고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2)이라 불러주신다. 비록 이 기대가 종말론적인 저 끝(그리스도의 나타나심, 7),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8)로 비로소 세워질 것이라는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마치 탕자와 같은 성도요 교회인 저희를 당신의 넓은 사랑의 품에 품으신다.

이런 신뢰와 사랑이 있기에 불완전하고 부조리한 고린도교회를 향해 감사예찬’(4-9)을 쏘아 올린다. 이제 바울이 쏘아올린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는 바울의 심장을 출발하여 너희에게 전달되기 시작한다. 당신과 고린도교회를 바울을 다리 삼아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9), 그분의 신실하심을 찬양한다.

나 또한 바울과 고린도교회가 그러했듯이 진정 가슴(심장)에 있는 이야기를 토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꿈꾼다. 그리고 이럴 수 있는 사역자에로의 거룩한 몸부림을 그리스도의 날’(그리스도의 나타나심, 7,8)까지 계속해 가기를 꿈꾼다.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한 주의 마음을 읽어가면서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부름 받은 사역자로서의 나의 나됨을 고린도전서에 함께 실어본다. 왠지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고린도교회를 향해 붓을 든 바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조각가의 손에 들린 게 돌덩어리이지만 마침내 그 예술가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고야 만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주인이신 그분의 손에 들려있다. 그분은 비록 문제 많고 탈 많은, 그래서 교회라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못난 고린도교회일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2a)로 만들어 내실 것이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하루요, 새 달이이기를 기도에 담아 주께 올려드린다. 비록 고린도교회처럼 볼품없어도 주님이 계시니 안심이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께 나를 맡기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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