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파트너쉽.partnership(엡 5.22-6.9)

20220914-15(묵상)

  

 

 

새로운 파트너쉽(partnership)

Ep. 5.22-6.9

  

 

    본문 관찰

 

    가정행전

       남편과 아내(5.22-33)

       부모와 자녀(6.1-4)

       상전과 종(6.5-9)

  

 

세 가지 새로운 관계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새사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진다.

에베소서가 쓰여질 당시는 여자와 노예()들은 사고파는 물건과 짐승처럼 취급되던 때였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신 것을 감사하던 그런 별난 시대였다. 이때 [바울복음]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빛의 자녀라는 영원한 가치를 어두움(옛사람)으로부터 견인해 낸다. 한편 종(고용인)과 상전(고용주) 사이에서도 주께 하듯”(5.22, 6.7)이라는 영적 원리가 동일하게 흘러야함을 말함으로써 삶의 전 영역이 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동일한 원리 아래 있음을 교훈한다.

당시의 사회는 오늘날처럼 핵가족화된 것이 아니라 가정은 부부와 자녀와 종들이 함께 어울러져 만들어진 하나의 사회였다. 그러니까 가정이면서 사업이 이루어지는 곳이 가정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소위 가정윤리를 이야기하면서 이 셋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5.22-33)

 

                          사 랑

         그리스도 --------> 교 회

         [남 편] <--------- [아 내]

                          복 종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 모든 일에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22-24),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25-33).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부부사랑을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사랑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기에 그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할까.

무엇보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사랑이다(25).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5.27, 1.4b 참조)었다. 바로 이와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것도 자기 몸같이 하라 하신다(5.28). 주님이 교회를 위해 이처럼 사셨듯이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자신을 바침으로써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5.32).

남편 존경하기와 아내 사랑하기는 같이 간다. 아내는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동시에 남편은 주님이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셨듯이 아내에게 각각 존경과 사랑을 통해 섬기며 피차 복종’(5.21)하며 살아야 할 책임과 특권이 있다. 아내가 하는 만큼, 남편이 하는 것에 따라 조건적으로 명령되고 있지 않다. 배우자가 하는 것 봐서 그만큼만 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인간적인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가정을 돌아본다.

얼마 전에 John Gray가 쓴 [MARS AND VENUS TOGETHER FOREVER](“여자는 차마 말 못하고 남자는 전혀 모르는 것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남편으로서 역시 나에게도 가장 부족했던 것이 부부간의 대화를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거기에서 사소한 틈이 벌어지고, 그 틈새만큼이 아내와의 멀고도 가까운 거리였음을 생각해 보고 있다.

 

 

부모와 자녀(6.1-4)

 

가족윤리가 붕괴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전혀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신문을 보면 현대판 고려장(高麗葬)이 지금도 제주도나 해외여행에서 종종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 밖에 달리 소망이 없어 보이는 시대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이중의 의무는 순종과 공경이다. 이것은 공히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이다.

왜 부모님께 순종해야 하는가. 먼저 자식의 마땅한 도리라는 성경은 명령한다: “이것이 옳으니라.”(6.1a) 또한 복 받는 비결이기 때문이다(6.3). 잘됨(A)과 장수(B, 20.12)라는 두 약속의 연결성(A+B)을 주목한다. 이것은 자녀의 성경적 도리를 다 한 후에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복이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했음에도 복()이 약속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이며, 또 행하기 어려운 약속일까 싶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고 서로 쌍무적이다(4). 자녀의 책임으로 명령된 말씀은 부모가 자녀를 향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이거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녀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은혜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글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2.22)는 새사람이다.

좋은 부모는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기르”(4, 현대인의성경)는 자이며, 이럴 때 그 자녀 역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람으로써 좋은 부모로 세움을 입게 될 것이다(4.13-16). 나 한 사람이 새사람으로 건강하게 살면 가정이 주님의 몸된 교회처럼 세워져간다는 이 축복을 나에게 주신 가정 안에서도 누리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자녀는 부모 마음대로, 그래서 부모의 뜻을 이루는 대리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인 말씀대로 양육되어야 한다. 그래서 저들의 생애에서도 동일한 가정의 영광과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빚어 가시는 작품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책임은 무엇일까. 정말 영적 권위가 있는 부모가 되고 싶다.

 

 

상전과 종(6.5-9)

 

당시의 한 가정의 시스템은 부부와 자녀와 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인 복음(3.28)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한 형제가 되는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게 됨으로써 기존의 질서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나 종과 상전의 관계가 무너지는 이 새로운 질서는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제국, 사회)의 존립을 흔들 수 있는 위험 요소였다.

지금 바울은 이런 사회적 배경 안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5-8). 이것이 주인과 종이 복음 안에서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종들에게만 요구되는 명령이 아닌 주인에게도 복음의 명령을 하고 있음이다(9). 기존의 질서의 틀(형식)이 그대로 유지되는 듯하지만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에는 이미 주종(主從)의 관계는 깨어진 셈이다. 이것이 69절의 힘이다.

 

    “성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모든 사람은 다 하늘에 계신 상전이신 분, 그리스도의 종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주종(主從)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들 모두는온전한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이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를 경외(敬畏)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와 같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5.23)라는 말씀은 가정(부부)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높고 귀한가를 짐작하게 한다. 아내도 남편도 공히 자신을 위해서 살거나, 또 이를 위해 배우자가 필요한 게 아니다.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 있고, 배우자를 위하고, 또한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태도와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한 몸이다(5.31). 이처럼 하나님은 아내(남편)를 통해 남편(아내)이 복되게 되기를 기대하시는 것 같다.

나 또한 자녀의 자리에 있다가 부모가 되었다. 자녀도 연습 없이 바로 실전이었듯이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다가 틀리면 고쳐가며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좌충우돌(左衝右突) 하면서 더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다. 물론 실패하고 넘어진 것들을 통해서도 소중한 것들을 배우고, 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만 말이다.

자녀이면서 동시에 부모인 지금이 더 힘겹고 버거운 때를 살아간다 싶다. 내가 먼저 자녀였으니까 자녀에게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과 삶을 보면서 지냈으니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역시 어렵잖게 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도 과히 빗나간 생각은 아니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전(實戰)은 여전히 그리 만만치가 않다. 이게 고민이요, 그대로 기도가 된다.

남편 31(1992/04/25), 아빠 23(1999/12/06)을 지나고 맞으면서 오늘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삶의 필드(field)에서는 나의 못남과 추함만이 쌓여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은 입으로 외치는 구호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살자!"는 반복되는 다짐들에 별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실패도 실수도 있지만 이것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걱정보다는 기대와 소망이 더 크다.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기쁨과 성실함으로 감당하는 것, 이게 에베소서 정거장에서 내 마음판에 기록하는 소중한 메모다. 아내로부터도 지금보다 더 존경받는 남편이고 싶고, 아들에게도 마음과 마음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아빠이고 싶다. 교회 같은 [가정행전]의 증거가 되고 싶다. 다음 정거장이 저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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