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1-13(묵상) 초안 - 20020612
세상 속에서, 빛의 자녀로!
Ep. 5.1-21
본문 관찰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1-2)
순결하라(3-5)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6-14)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5-21)
어두움 vs 빛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기초는 사랑이다(1-2).
하지만 그 반대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닌 음행(porneia)은 천국을 상속받지 못하게 한다(3-5). 천국은 아무나 쉽게 다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지지만 단지 악에서 분리된 삶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열매 없는 어두움을 버리고, 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6-14). 결국 이 세상은 빛과 어두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어두움이라는 어리석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14-15,17). 그만큼 시대가 죄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악하기 때문이다(16). 여기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18), 그것은 삼위 하나님 안에서 찬미의 제사(예배, 19)에 따른 감사(20)와 복종(21)이라는 새로운 은혜로 이어지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지만 빛의 자녀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동시에 그렇게 살도록 하신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1-14).
새사람은 세상과 다르게, 그러니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다(4장). 이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1),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2a)는 것을 요구한다. 기준과 수준이 단순한 윤리적인 눈금이 아니라 자그마치 예수님처럼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음행(porneia)과 모든 더러운 것(온갖 추행)과 탐욕에 찬 말(3), “누추함(obscenity, 저속어)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4), 그리고 이러한 짓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다(5a). 왜냐하면 이러한 짓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5b).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천국 백성답게 언행하며 살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리석은 말로 속이는 불순종의 아들들과 관계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멈추고(6-7), 즉 열매 없는 어두움에 끼여들지 말고 그런 일을 책망하며 살 것을 이야기한다(11).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8a)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은밀히 행하는 부끄러운 것들을 버리고(12), 오직 빛의 자녀답게 행하며 살아야 한다(8b).
이렇게 해서 음행을 따라 사는 어두움의 자녀와 열매 맺으며 사는 빛의 자녀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죄로 가려진 어두움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오직 빛 안에서만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9)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사는 것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10), 희망이다.
빛 안에 있을 때에 모든 것이 투명하고(12), 죄가 드러나고(13),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9), 순결하며(3-5), 어두움이 양산하는 모든 추악하고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하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가 빛이라면 세상은 여전히 어두움이다. 비록 우리 역시 ‘전에는’ 어두움의 편이었지만 ‘이제는’ 빛의 자녀로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 은총의 부르심은 지금 나에게도 유효하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푸이시리라!”(14) 진실로 아멘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5-21).
새사람은 음행이라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통해 열매를 맺으며 산다. 바로 이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살피는 지혜다(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 그렇잖은가.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고, 세상과 다르게 살려면 ‘지혜 있는 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지혜는 다음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지혜자는 빛 가운데서 열매 맺으며 살도록 부르심을 입은 모든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한다(16). 왜냐하면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 다시 어두움의 우상들이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둘째, 지혜자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다(17). 삶의 채널을 주님께 맞추지 않으면 언제 어리석은 자로 추락할지 모른다. 빛이 물러가면 어두움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법이다.
이제 빛의 자녀인 새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충만한 삶을 약속 받는다(18-21). 특별히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의 온전함을 주도하신다(18). 그리고 그 결과로서 서로 화답하고 노래하는 찬미의 제사(예배, 19), 그에 따른 감사(20)와 복종(21)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 됨과 함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합력함으로써 온전한 교회의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18 → 19-21).
한편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는 말씀의 원어는 에베소교회(‘내’) 편에서 어떤 공헌이 작용해서 그것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것이며, 또한 단회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나 계속 반복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세워진 교회이지만(1-3장) 여전히 옛사람의 잔재가 남아있고,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교회로 하여금 이미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1.13) 다시 한번 이를 “받으라!” 명령한다.
부스러기 묵상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살리시오.
이 시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16, 새번역)
음행(porneia)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천국에 참여하지 못한다(5).
이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2.22) 가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사람(어두움)과 새사람(빛)의 중간지대는 없다.
행동으로 지은 죄는 물론이거니와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4)다 하신다. 영혼의 상태가 입술이라는 창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다. 이처럼 거룩은 언어생활까지를 포함된다(4.25,29-32). 저속하기 그지없는 이메일을 지우기 위해서 커서를 올려놓기만 해도 인터넷으로 접속이 되어 버리는 경우, 그래서 지워도 지워도 계속 만들어져서 열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그냥 전원을 끈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가끔씩 그 잔상이 남아 나를 괴롭힐 때면 “오 주여!”가 절로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내 의지와 결단을 통해 나 스스로를 지켜내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마저도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오늘날처럼 고민하며 살아온 적이 또 있을까. 하나님만이 나의 [경건생활지수]를 다 아신다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내 영혼의 창에 펄럭이게 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나를 빛 앞에 세우지 않으면 그 순간 나는 어김없이 사탄의 그늘이라는 그의 지배권 안에 처하게 된다. 빛만이 어두움을 몰아낸다. 어두움을 통해서는 결코 빛을 맛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내 영적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내 영적 시계(視界)가 어두움으로 물들지 않도록 빛되신 주님 앞에서 새사람으로 사는 일에 승리해야겠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그 때가 악했다면(16b), 지금 우리시대는 최악(最惡)의 때가 아닐까.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포함하여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18). 성령님께 푹 잠기지 않으면 언제 어두움의 밥이 될지 모를 일 아닌가. 성령충만 이후의 그림이 복되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19-21).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가득하기를 다시금 온 몸과 마음으로 소망한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18)는 말씀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