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6(묵상) 초안 - 20020606
바울복음의 비밀
Ep. 3.1-13
본문 관찰
바울 복음(1-6)
사역자론(7-13)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수됨을 환난으로 인식한다(13).
그러나 이것을 절망과 낙심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을 ‘너희’(에베소교회, 이방인)를 위한 영광으로 받아들인다(1,13).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 갇힌 몸이 되어 당한 고난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시각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자기에게 임한 계시를 더 이상 비밀로 숨기지 않고 이방인들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게 되기를 갈망한다(2-4).
하나님은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10a)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그들과 한 지체가 되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는”(6, 표준새번역), 바로 이 위대한 약속에 참여하게 하셨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이 놀라운 일에 ‘일꾼’이 된 것을(7) 영광스러워 한다.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11) 일에 쓰인다는 것을 바울처럼 언행(言行)하는 자가 복되다.
바울 복음(1-6)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6)
바울은 다메섹에서 전혀 새롭게 태어났다(3-4, 행9.1-31). 하지만 그것은 핍박자에서 핍박을 받는 자로, 드디어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힌 자 되게 했다(1). 그럼에도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2), 즉 이방을 위한 자기에게 직분을 맡기신 이 비밀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알게 되기를 기대한다(3-4).
그러니까 자신이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의 감옥에 갇힌 것은 물론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이 모든 [복음행전]은 계시의 성취로 통찰하고 있다. 바울 개인의 야망과 같은 인간적인 산물이 아님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임을 선포한다. 건강한 사역은 건강한 신지식(神知識)이라는 통찰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유대와 이방의 구분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2.13-19). 이것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의 본질이다(2.20-22).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받은, 또한 비밀이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이 계시가 마침내 상속권자가 된 이방인에게서 ‘함께’(6) 성취되어가고 있는 영광을 본다. 이것이 바울이 1-3장에서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영광이다.
바울이 이처럼 우리(유대인)와 너희(이방인)를 구분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당시 유대주의(율법주의) 세계관은 ‘이방 세상’까지를 품는 일에 매우 배타적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때문에 바울은 ‘우리’ 메시지를 시작으로 ‘너희’(1.13)를 품기 시작하더니 2장까지 줄기차게 ‘너희’를 향한 복음을 증거한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2)
그리고서 곧바로 이어 “이러므로”다(1). 즉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갇힌 자’의 비밀을 6절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방에 대한 성경의 관심은 신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모든 족속” 안에 포함되었다(#특주 참조). 이처럼 교회는 이방인 너희를 품고, 그리하며 마침내 저희들 역시 우리의 영광된 자리에 세우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만이 아닌 나에게도... 이것이 교회론이 보여주는 비밀이다.
사역자론(7-13)
“이 복음을 위하여 …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7-10)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이라 부른다(7).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주님이 쓰시는 종이라는 자기 이해를, 또한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탁월함과, 그럼에도 자신은 주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겸손함을 잊지 않는다(8a). 그는 죽음에 이르는 길마저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읽어내는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나 잘되기 위해 복음과 교회와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무엇인가를 지금보다 더 많이 바라는 나의 모습과, 최악으로 열악한 형편에서도 복음의 비밀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바울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교된다. 벌써부터 예수님 때문에 주어지는 부스러기들을 기웃기웃 거리다가는 이방인들처럼 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마6.31-32). 내가 봐도 한심한 나를 어찌할까.
한편 바울은 자신이 일꾼인 분명한 이유들을 몇 가지로 밝힌다(8-10). 첫째,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8, 행9.15). 둘째, 하나님의 뜻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다(9). 셋째, 예수님 안에서 세우신 영원한 계획을 세상으로 하여금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10a)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다(10-11). 바울이 일꾼이라면 나 또한 동일하게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자기 이해가 있었기에 자신의 환난을 통해서도 이방인의 영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자신을 보는 눈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혜와 계시의 정신”(1.17)이 있어야 균형 잡힌 언행(言行)을 따라 살 수 있다. 감옥에 있어도 영적인 세계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은 자신은 죽고, 오직 주님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오염된 시각에서 완전하신 주님을 어찌 파악할 수 있으랴.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13)
복음을 위해 ‘일꾼’됨을 영광스러워 한 바울 앞에 선다(7,13). 이것의 기초는 하나님의 ‘계시’(3)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자기를 포장하는 이력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결코 재주 부르지 않는다. 남들과 좀 다르게 받은 소명이라는 경험과 체험을 앞세워 주님이 다스리시는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이 주인인 추한 모습으로 추락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자신에 대한 건강한 사고와 삶을 낳는다. 바울이 이 열악한 환경에서도(1,13) 끝까지 초지일관(初志一貫)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주님의 일꾼이라는 분명한 신앙고백 때문이었다. 그의 변함 없는 모습에서 부끄럽고 초라한 나의 몰골을 본다. 주께 해 드린 것은 적으면서 권리와 특권은 할 수 만 있으면 언제든 꺼내 들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몹시 실망스럽다.
자신은 도구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계시가 “교회로 말미암아”(10a)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바울에게서 교회 사랑의 진수를 맛본다. 그는 이를 위해 기꺼이 ‘일꾼’의 자리를 행복하게 받아들인다. 종이 주인처럼 행세하기 시작하는 순간 주님이 주인이신 교회의 모습은 뒤죽박죽 되고 만다. 위대한 사도마저도 자신을 종의 자리에 놓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목회하였다면 내가 가야 할 길 역시 분명하지 않은가.
이처럼 바울이 믿어 행했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 하나님께 나아감”(12)을 내 안에서도 맛보고 싶다. 내가 바르고 건강하게 언행하고 있다면 내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또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그래서 늘 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있지 않을까. 아직 이것이 희미한 것은 양다리를 걸치고서 엉거주춤 한 모습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결코 주인일 수 없는 그분의 종이기에 바울처럼 나 역시 주님의 종(일꾼, 머슴, 노예)의 자리에 나를 묶어 두어야겠다. 이런 못난 나를 종으로 쓰시는 하나님의 마음, 어떠실까.
[특주]
은혜를 입은 성경의 이방인들: 구약 & 신약
[1] 구약: 유대인 밖에도 구원이 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 창12.1-3(“모든 족속이”, 갈3.8,14 참조)
*요셉의 아내(보디베라의 딸): 두 지파(므낫세, 에브라임)의 어머니
*다말: 가나안(창38.11-14, 대상2.4)
*수많은 잡족: 출애굽(출12.38)
*기브온 거민들: 할례(수9.3- , 수23.12-13,16 참조)
*에돔 & 애굽 사람: 3-4대 후 자손(신23.7-8)
*라합: 여리고(수6.25, 히11.34)
*룻: 모압(룻1.4)
*밧세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삼하 11-12장)
→
[2] 신약: 구원은 이방인에게 차별적이지 않다.
*마12.21 -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사42.1 참조)
*가나안 여인: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
*이방인 문둥병자: 한 사람(눅17.18)
*많은 사마리아인: 예수를 믿는지라(요4.39)
*요1.12-13 -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행9.15 -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갈1.16, 2.8 참조)
*행10.45 -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
*롬3.29 -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롬11.11 -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롬11.25 -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엡1.13-14 - “너희”(1.13, 2.1-2,11-) → 3.1(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갈3.23,28-29
(계7.9 -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 144,000명(7.4)은 “처음 익은 열매”다(14.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