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5(묵상) 초안 - 20020605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꿈
Ep. 2.11-22
본문 관찰
너희는 그 때에(11-12)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 너희가(13-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제부터 너희는(19-22)
그때와 이제,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명한 ‘전환점‘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 앞에 선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구나!”라는 신앙고백이 있게 된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나는 ‘그 때’에서 ‘이제’로 변화되었다(11-12 → 13-18). 이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사실 나는 ‘그 때’에는 유감스럽게도 ‘이제’의 것들을 알지도, 깨닫지도, 믿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전적 무능력 상태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 또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영적 차원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이제’가 갖는 풍성한 삶과는 전적으로 분리되어 산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4)이 ‘그 때’(1-3,11-12)만으로 묶어 두지 않았다. 드디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때’에서 ‘이제’로의 영적이고 또한 전인적인 차원이동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제’에서 ‘그 때’를 보게 되었다. 이는 결코 ‘그 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말이다.
그러자 나의 지난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어둡고, 저주 아래에 있었으며, 사탄의 지배와, 인간의 욕심, 그리고 죄악의 지배 아래서 아무 소망 없이 살아왔었는가를 비로소 보고, 알고, 깨닫게 되었다. 이 둘 사이가 비교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라 말한다. 이것이 ‘이제부터’ 지어져 가도록 부르심을 입은 교회의 삶이다(19-23). 내 안에 있던 막힌 담까지도 헐어주신 주님을 찬양한다(14).
‘그 때에’의 옛생활(11-12): 구원받기 이전인 과거
당시 에베소교회에는 ‘나는 이방인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유대인이요, 무할레당이 아니라 할레당이기에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살 수 있는가. 구원이란 이러한 외적 조건들이 채워질 때 비로소 확증되는 것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무슨 선한 일이나, 도덕(윤리)적으로 흠 없이 사는 것이나, 착하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혹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비로소 [구원적부심사](救援適否審査)를 통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마치 내가 어떻게 사는가로 말미암아 받을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고, 없던 것이 있게 되기도 하고, 있는 것이 취소되기도 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구원을 위해 나는 유대인이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자꾸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그러나 유대인이요,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11). 이스라엘의 영적 교만이 이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 그리고 무할례자들을 아주 천시(賤視)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자신들만이 구원의 가문(家門)이요, 구원의 문중(門中)인 것처럼 이상한 행세를 했던 것이다.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부모가 예수를 믿는다고 자녀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세례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 개인적이다. 남편들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고 전도하면 “난 아내 치맛자락 붙잡고 올라갈 겁니다!” 그런다. 그러나 치맛자락이 구원의 줄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이것이 ‘그 때’의 실상이다. 태어나서, 자라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자녀들 낳고, 돈 벌고, 잘 살고, 나이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다. 이 세상 그 어떠한 종교나, 철학이나, 학문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불로초도, ‘죽음 이후’를 해결하지 못했다. 인간이 사는 70~80년은 마치 화병에 담겨 있는 시한부 꽃과 같다. 꽃이 지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다.
‘이제는’의 새생활(13-18): 구원받은 이후인 현재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가 ‘그 때’의 절망을 자각하거나, 해결하거나, 끝낼 수 없다. 이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해결하셨다. 그러므로 ‘이 때’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그 때’의 참상을 회개하고, 그럴수록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된다.
‘그 때’에서 ‘이제’로의 구원은 종교적인 경력이 쌓여가고, 신앙의 경력이 많고, 교회 다닌 년 수가 늘어나도 그것으로서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깊이와 넓이와 풍성함을 결코 맛 볼 수 없다. 결국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길이요(The Way), 진리요(The Truth), 생명이다(The Life). 생명은 생명으로 말미암는다. 죽음은 결코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다.
다른 이름은 없다(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왜 그런가? 죄인이 죄인의 죄를 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되기 이전의 사울이 그랬다(행9.1-9).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만 한 그 어떠한 조건(자격)도 없는 자였다. 그는 도덕(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착하고, 선하고, 구제하고, 바르게 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부르심을 받는다.
만약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행위로 되어진다면 다음 몇 가지에서 문제가 생긴다.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이라는 구속 사역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나의 행위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하등의 이유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이 유동(가변)적이게 된다. 소위 영적으로 컨디션이 좋을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시험, 환난, 유혹, 범죄, 악과 같은 문제들에 걸려들게 되면 그때는 구원이 취소(파괴) 되어진다. 다시 말하면 없던 구원이 나의 선행으로 생겨지기도 하고, 있던 구원이 나의 행위로 없어지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구원이 이런 것인가.
지어져가는 교회(19-22)
‘그 때에’(11-12)에서 ‘이제는’(13)으로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14-18)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기에 그 인간으로서는 이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춰 에베소 복음을 선포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이처럼 오직 예수님 때문에 성전이 되어 가고(21),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간다(22).
부스러기 묵상
나는 ‘그 때와 이제’가 철저하게 구별되어 있는가?
‘그 때’에는 나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때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부분이 나를 절망하게 만든다. 아직은 나에게 소망이 있다고 믿고 있는 알량함이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이것이 지금도 ‘그 때’와의 공존하기(동거하기, 물타기)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부조리한 삶의 또 다른 단면이다.
‘이제’(4-10,13-22)가 가난할수록 ‘그 때’(1-3,11-12)를 동경하게 되는 것 같다. 때문에 ‘그 때’의 실체가 어떠했는가를 철저하게 깨닫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 때’는 아무 소망이 없는 때였다고 고백하는, 바로 그 ‘이제’를 살고 싶다(갈2.20). ‘이제’ 다시는 ‘그 때’와는 상관없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이제부터’는 ‘그 때에’와 다른 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때다. ‘너희’였던 내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되는 복을 받아 ‘하나됨’(14,15,16)을 이루었는데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막힌 담이 헐렸으니 이제부터는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은 은혜를 따라 살아야겠다.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자꾸만 쉬고 싶고, ‘그 때’를 동경하고, 가끔은 남몰래 세상을 즐기고, ‘그 때’와 ‘이제’를 적당하게 줄타기하며 사는 한심한 모습이 잘라버린 가지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이제는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21-22)고 싶다. 60년을 걸려 공사를 했으면 이젠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느 만큼, 어떤 모습으로 지어지고 있는지, 정말이지 쓸 만 한 것으로 지어질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지어지지 못하던 그 때에, 그것만큼 모래 위에 세우려던 욕망 섞인 부분을 수리해야겠다. 주님이 내 안에 평안히 거하시도록, 그리고 ‘우리’로 엮어주신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누리는 것, 이것이 지금 당장 내 영혼의 창에 걸어야 할 ‘공사 中’ 푯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