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1(묵상)
종말론적 영성(靈性)
2 Thess. 3.1-18
본문 관찰
기 도(1-5)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1)
너희에 대하여는(4)
게으름에 대한 경고(6-15)
게으르게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6)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 사귀지 말고(14)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15)
인사와 축도(16-18)
생활일기
데살로니가교회는 어떤 생활을 추구해야 하는가.
바울은 저들에게 주의 날이 임하기까지 ‘굳게 서라!’(2.15)고 권면한다. 그리고서 기도한 후에(2.16-17),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1-2), 또 저들을 위해 중보한다(3-5). 종말을 사는 자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생활인가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 후에 바울은 종말을 산다는 것을 오해한 나머지 일상생활의 영성을 잃어버리고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자들을 엄히 경계한다(6-15).
정상적인 일상의 삶을 살지 않는 자가 어찌 주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종말을 맞는 가장 성숙한 삶의 자세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성실하고 규모 있게 살아가면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성결한 생활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을 건강하게 사는 자의 생활윤리이자 일상생활의 영성이다.
기 도(1-5)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 … 하라!”(1-2a)
이제 종말론적 생활편이다(3장). 어떤 생활인가. 바로 기도생활이다. 그 가운데서도 중보기도다. 이미 주의 재림이 왔다고 하는 거짓 복음에 흔들리는 교회가,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그런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다. 이를 위해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1-2), 또 저들을 위해 중보한다(3-5).
종말스럽게 사는 법칙들(6-15)
인사와 축도(16-18)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14-15)
‘명하다’(명령하다, 4a,6a,10a,12a)는 표현이 반복되듯이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강하고 절박하며, 그래서 그만큼 또한 선명하다.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이러한 목회적 권면이 바르게 사는 데살로니가교회와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르게 사는, 그러니까 게으르고 빈둥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규모 없는 자들’(12)에게까지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 바울이 지적하는 규모 없는 자들은 누구인가. 복음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자들로서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자들이다(6). 바울은 앞에서 이미 이런 자들을 ‘권계’(훈계, 살전5.14)하라고 했는데 채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이번에는 저들을 멀리하라고 명령한다(6b).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고,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들은 바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한 자들에게 희망이란 없다는 얘기다.
둘째로, 도무지 일하기를 싫어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자들이다(10-11). 한 마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함으로써 종말(재림)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역시 이미 앞서 전한 바대로 살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살전4.11). 저들은 재림이 코 앞에 와 있는데 일해서 뭐하냐며 오늘이라는 일상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을 비웃고 또 업신여겼으며, 정작 들어야 할 복음은 듣지 않고 어쭙잖게 신앙에 대해서 훈수(참견)하기를 당연시 하였다.
사실 이들이 데살로니가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보다 더 성숙한 교회가 되는 일을 방해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저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형제’(6b)이며, 예수 안에서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12b)는 말씀을 명령으로 받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비록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4b)는 지침을 말하지만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15)는 말씀이 바로 이어질 만큼 저들을 향해 할 수만 있다면 바울은 먼저 문을 닫지 않으려 한다.
아직도 데살로니가교회 안에는 ‘너희’(10)와 ‘이런 자들’(11-12)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형편 속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바로 이 점이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는 친히 먼저 성도(‘나’)가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였다(8-9). 또한 전에도 가르쳤고(10), 지금도 종말스럽게 사는 법칙들을 바른 복음으로 토해내고 있다(11- ).
부스러기 묵상
“사람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2b, 새번역)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13)
기도를 부탁한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뭘 의미할까.
아마도 데살로니가교회에서처럼 주의 말씀이 퍼져나가는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이(1), 그리고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이(2a) 한결같이 믿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음을 바울은 선교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나 역시도 말씀을 듣는 것과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바울은 아마도 데살로니가교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자들 역시 진정으로 그들이 믿음의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기대한지도 모르겠다.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은 자신이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종종 믿음이라는 앵글을 통해 자신과 주위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한편 교회를 순결과 거룩으로 보존하고 싶어 하는 바울의 열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나 미래의 시간인 ‘재림’(종말)과 관련하여 현재의 삶을 성실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데살로니가교회가 넘어야 할 신앙 성숙의 가늠자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더욱 그렇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주의 재림을 갈망하는 자였지만 그럼에도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8)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기억해 볼 것을 요구한다.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늘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하늘만 쳐다보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는 바울의 지혜가 절묘하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10) 바울은 이렇듯 당당하게 말하였고 또한 이 말처럼 살았다. 다 저들에게 본을 보여 이를 본받게 하려고 함 때문이다(9). 바르게 사는 것은 늘 외롭기에 낙심할 수 있다는 것까지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살피며 격려하는 바울에게서 목회를 배운다(13).
종말을 살아가는 자의 영적 성숙함이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잊지 말자(15). 나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엔 그런 사람들을 아예 마음 밖으로 밀어내 버리고 ‘원수와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위험은 내게도 없다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목회는 완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자들과 함께 가는 길임을 묵상해 본다.
그러기에 비록 바른 믿음과 바른 신앙생활을 자기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교훈하는 바울의 목회적 권면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 아닐까(14-15). 바울은 그런 자들에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고’(명령하고) 권고하고 있음을 예사롭게 넘겨버리지 말아야겠다(12).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목회의 대상이고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