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9(묵상)
핍박 로드맵(roadmap)
2 Thess. 1.1-12
본문 관찰
감사에서 격려까지(3-10)
간 구(11-12)
핍박에 대한 시각
고통에도 섭리가 있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교회는 박해와 환난을 먹고 자란다. 환난과 박해 중에도 이를 감사로 바꾸어 가는 참으로 놀라운 역전드라마를 써내려가는 것이 교회다. 그러니 바울이 감사로 두 번째 편지의 문을 열 수 밖에!(3-4). 그렇다면 이 고난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이 데살로니가교회가 전서(前書)의 혼돈을 떨쳐 버리고(임박한 종말론), 마침내 다시 쓰고 있는 이 후서(後書)를 통해 새롭게 통찰해야 할 고난신학이다(5-10).
이처럼 고난을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재림신앙은 균형 잡힌 모습으로 데살로니가교회를 견고하게 할 것이다. 때문에 바울發 ‘이러므로’의 기도(간구, 11-12)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편지가 되어 날아가게 된다.
From 감사 To 격려(3-10)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하나님께는 감사하고, 또 여러 교회에서는 너희를 자랑한다며 편지를 시작한다(3). 그런데 이것은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 드려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도 믿음은 더욱 드러나게 자라고, 또한 그것을 지켜가고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그뿐이 아니다. 이처럼 핍박 때문에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고(3), 또한 참고 견디며 복음과 교회를 지켜나가고 있다(4).
이것이 바울의 격려를 낳는다(5- ). 그러니까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4a)와, 그렇다면 너희로 하여금 이처럼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핍박자들(환난 받게 하는 자[6],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8a], 예수의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 자들[8b]), 이 양자에게 공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5a)가 된다. 그러므로 환난을 받는 ‘너희’들만의 환난과 핍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격려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4a)는 두 가지 사인(sign)이다. 먼저 너희에게는 환난과 핍박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5b) 할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다(7a). 이것이 너희에게 성취되는 하나님의 공의다(7a). 또한 ‘너희’와 대칭되는 ‘환난 받게 하는 자들’(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 8)에게는 환난으로(6b), 형벌로(8b), 더 깊게는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9) 받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집행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주의 강림하심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10):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 이렇듯 공의로운 심판이 교회를 격려하는 푯대가 된다. 놀랍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간 구(11-12)
이처럼 고난신학은 고난자(환난을 받는 너희, 7)와 핍박자(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 6,8-9)에게 공히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다(5). 그날이 바로 주 예수께서 강림하시는 종말이다(10). 이를 두고 바울은 중요한 한 가지를 붙든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11)
환난과 핍박 중에도 더 건강한 교회로 자라고 세워지기 위해 성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공의를 읽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친다. 동시에 이를 위해 기도의 무릎을 강하게 할 것을 권면한다.
부스러기 묵상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5.8)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標)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5)
고난의 스펙트럼은 넓고도 깊고도 오묘하다.
바울은 일단 이 문제를 이 땅(인간)이나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는 것을 위해, 그러니까 고난은 바로 그것 때문에 온 것으로 본다. 이것이 고난을 심리(개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갖는 근원적인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그렇다면 고난은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방식)대로 살려고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 살기로 했다면 그는 이미 고난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과 같은 말이다.
이처럼 5절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담대해 지면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눈물이 난다. 그렇다하더라고 고난과 박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다. 그러기에 기도가 필요할까(11-12). 그럴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이 고난과 박해를 내 능력과 실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11)를 놓치지 않는 기도의 중심인 이유이다.
고요한 바다로(찬송가 373장 2절)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고난을 먹고 자라서 마침내 피어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오늘이라는 또 하나의 선물인 새날 앞에 섰다. 주신 말씀 한 모금 마음에 물고, 하늘 아버지 한번 쳐다보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