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살전 5.12-28)

  • 데살로니가전서
  • 양무리
  • Aug 23, 2022
  • 76

20220828(묵상)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Thess. 5.12-28

  

 

    구조 관찰

  

    종말론적인 삶(12-22)

    인사와 축도(23-28)

  

 

재림의 노래

 

마지막에 될 일들을 알고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종말론은 교리(4.13-5.5)와 생활(5.6-11)로 균형을 잡으면서 좀 더 넓은 신앙 세계로 확장된다(5.12-22). 그렇다면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목회자와의 관계에서(12-13a), 성도(교회)와의 관계에서(13b-15),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명해 진다(16-22). 종말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변하고, 깨닫고, 알고, 확신하고,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바울의 확신(23-24)과 이 모든 권면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한 마지막 인사(25-28)가 밝고 힘이 넘치는 이유를 조금은 알 듯하다.

 

 

종말론적인 삶(12-22)

 

    ① 항상 기뻐하라(16)

    ②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③ 범사에 감사하라(18)

    ④ 성령을 소멸치 말라(19)

    ⑤ 예언을 멸시치 말라(20)

    ⑥ 범사에 헤아리라(21)

    ⑦ 좋은 것을 취하라(21)

    ⑧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22)

 

바울은 먼저 종말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12-13a). 이것은 함께 동역하는 목회자들로 하여금 종말을 이와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것이고, 또한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하는 것이다. 이처럼 목회자들과 성도들 사이에 목회자와 그의 사역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일치가 종말을 능력 있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둘째로, 성도들 간에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13b-15). 중요한 것은 화목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이루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훈계)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질서하게(제멋대로) 사는 사람을 훈계하라는 뜻이다. 무질서는 화목을 깬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서가 교회에서 깨질 때 그것은 곧 화목이 깨지는 것과 같다.

또한 화목은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격려)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나룻배처럼 마음이 약한 나머지 중심을 잃어버리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이 소리에 이 쪽으로, 저 소리에 저 쪽으로 흔들리게 된다(4.11,13). 이것은 서로간의 화목을 유지하는 것을 실패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서로 격려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힘이 없는 자들을 경제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을 붙들어(도와) 주는 것이 화목이다.

특별히 화목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사람과의 문제는 인내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발생한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화목은 인내를 먹고 자라고, 인내는 화목이라는 열매를 맺게 한다. 오해는 시간이 지나면 풀리지만 그러나 화목이 깨진 흉터는 남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참아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를 참으사 하늘 보좌의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2.5-11). 인간관계에서 언제나 성공하는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인내하는 사람들의 몫임을 기억하자.

셋째로, 종말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16-22). 이것은 명령이다.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뜻은 이루어져야 가치가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뜻은 아무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16-18)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어떠한 형편에서도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기도는 호흡과 같으며, 감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풀어야 한다. 물론 기쁨과 기도 역시 하나님 쪽에서 이해하고 신앙해야만 그 깊이와 비밀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역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아마도 데살로니가교회 안에도 성령의 불을 끄거나(19),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언을 멸시하는,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말”(20, 공동번역)을 멸시하는 그런 소방수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의 시각에서 이러쿵저러쿵 하기 시작하면 은혜는 소멸되고 차디찬 율법이라는 잣대와 자기 의()만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교회의 흐름이 꺾이고 만다. 하나님은 성령님이 능력 있게 역사하는 교회를 원하신다.

이 뜻이 나의 불신앙과 고집과 나의 경험에 제한되는 어리석음이 성령님이 소멸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의 기준대로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은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21-22, 공동번역)를 행하면서 살자. 그래야 성령님과 보다 더 친밀한 사귐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사와 축도(23-28)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종말론적 윤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초점이 맞추어진다(23,24).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종말론적인 삶의 풍성함 가운데로 당신의 백성들을 초대하실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은혜되지 않도록 또 하나의 행위를 더 신뢰하는 것이고, 내 능력과 자질과 열정으로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인본주의를 낳는 결과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의 주도권은 신실하신(미쁘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한다.

바울마저도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기로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 하나님이 친히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 영혼과 몸까지 주의 재림 때까지 흠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또한 기도한다(23).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을 느끼는 대목이다. 또한 저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함으로써 기도로 동역하고(25), 기도 가운데 서로를 축복하고 섬기며 살기를 기대한다. 한편 이 복된 소식은 데살로니가 모든 성도들이 다 들어야 할 복음이다(27).

 

 

부스러기 묵상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라운 복음인가. 비록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교회(新生敎會, 17.1-15)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통해 복음의 영향력을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에게까지 향기나게 하는 데살로니가교회였다(1.2-8, 3.12, 4.10). 하지만 재림신앙과 신학에 있어서만큼은 유독 어린아이와 같았다(4.13-18).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먼저 사별(死別)한 가족들이 주의 재림 때에 어찌될까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이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았고(3.6), 그래서 재림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5.1-5) 저들을 격려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중간마다 마치 보석처럼 주님의 강림(降臨)하심에 대한 신앙이 빛나도록 배치하였다(1.10, 2.19, 3.13, 4.16, 5.23). 그리고 이를 데살로니가교회와의 문안 인사에 담아 종말을 사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면서 이제와 앞으로의 삶의 색깔이 어떻게 채색되어야 할 것인가를 목회적으로 권면한다(6- ). 이처럼 중요한 가르침일수록 모두에게 다 필요하다(27).

재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며 그것에 따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저희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저들을 향한 목회자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데살로니가교회가 행복하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저들의 영적 형편을 살필 수 있는 지도자가 있고, 그것에 대한 바른 대답을 줄 수 있는 목회자가 있음이, 이런 영적 가르침을 주고 받을 수 있음 때문일 것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데살로니가교회처럼 겸손하게 뭔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면 더 소중한 것은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아닐까 싶다. 영적 성장은 그래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다. 베드로의 권면에 따르면 대답을 할 때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아야 하고, 상대방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그 진리는 말하는 자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무릇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법이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성도들을 떠올려 본다. 나는 지금 무엇을 예비하며 살고 있는가. 푸르고 푸른 주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데살로니가교회를 바라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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