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7(묵상)
그리스도의 재림
1 Thess. 4.13-5.11
본문 관찰
주의 재림, 휴거(4.13-18)
재림, 그 때와 시기(5.1-11)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마지막에 될 일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4.18)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5.11)
이미 죽은 사람들은 주의 재림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의 재림에 관한 생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저들은 이미 죽은 자들을 주의 재림 때에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 때문에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4.13)고 괴로워하였다. 아마도 이 교리는 이미 가르쳤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한 교리(5.2,1-5)와는 달리 아직 바울이 저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던 새로운 교리였던 것 같다(4.13a,13-18). 이렇게 해서 재림에 대해 알았고, 또 새롭게 알게 되었으므로 주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듣게 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5.6-11).
주의 재림, 휴거(4:13-18)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
주님은 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행1.9,11). 데살로니가교회는 이러한 재림신앙에 대해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5.1-5). 그런데 사별(死別)한 가족들을 주의 재림 때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무지함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았다(4.13). 바울은 유독 이렇듯 아직 종말론에 대해서만큼은 어린아이와 같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책망이 아닌 주의 재림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는 기회로 삼는다. 위기가 오히려 주의 복음을 좀 더 온전케 하는 기회가 된 셈이다.
재림의 파노라마
① “먼저 배교(apostasy)하는 일이 있고”(살후 2.3a)
②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살후 2.3b)
③ “주께서 …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 4.16a)
④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b)
⑤ “그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살전 4:17a, 다 변화하리니 – 고전15.51-52)
⑥ (온 성도가)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7a)
⑦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b)
※요한계시록에는 특별히 ‘휴거’(⑥)와 관련된 말씀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의 재림 전에 죽었든(‘자는 자’), 주의 재림을 살아서 맞이하든(‘살아 남아 있는 자’) 모든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 때에 영광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것이다. 때문에 데살로니가교회가 이 복음을 듣고 또 믿는다면 이제 해야 할 것은 소망 없는 다른 이들처럼 슬퍼하는 것을 버리고 재림의 소망 안에서 서로 위로하는 일이다(4.13 → 18).
성도(‘나’)의 재림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신앙에 기초한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4.14)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이를 더 분명히 한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6-19)
한편 ‘우리’(17a)에 바울 자신이 포함된다면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나 싶다. 주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막9.1).
재림, 그 때와 시기(5:1-1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5.1-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36-37)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과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이미 복음서에서부터 알려진 교리다(5.1-3, 마태복음 24장).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문제가 되는 것은 재림의 때와 시기를 인위적으로 계산하거나 추측함으로써 오는 교회의 혼란이다. 데살로니가교회도 이 교리를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5:2) 오해함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3.11). 그래서 바울은 이 주제에 대해서도 다시금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꼈다.
어두움에 있는 ‘저희’와 빛의 아들인 ‘너희’의 대비가 절묘하다(5.3 ↔ 5.1-2,4-5). 이렇듯 재림은 예비(준비)하는 자의 것이며 그것은 어두움, 즉 자고 취하는 생활(5.3,6-7)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오는 생활을 하는 자의 것이다. 문제는 빛과 낮에 속한 아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내용이 매우 분명하다는 점이다(5.6-11).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5.9) 은혜 안에 있는 자라면 ‘저희’(어두움에 있는 다른 이들)와 다르게 살아야 한다.
이처럼 다르게 사는 것이 ‘우리’됨의 영광스러움을 누리게 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5.8, 공동번역) 재림은 그저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망애(信望愛, 1.3)를 좀 더 강렬하게, 영적 전쟁을 치르는 군사답게 삶의 자리에서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자의 삶이다(5.10).
바른 재림신앙은 공동체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그리하여 서로 격려하며 서로 도와주면서 덕을 세워가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함께 더불어 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게 꿈꾸는 종말론적 삶의 코드가 바로 이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수 있는 자는 ‘소망 없는 다른 이’(저희, 어두움, 다른 이들, 자는 자들, 취하는 자들, 4.13, 5.4,6,7)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가 이 재림의 복음 위에 우뚝 서는 것을 소망하듯이 주님은 내게도 재림신앙이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기를 기대하신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 말고 ….”(5.6)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자들을 생각해 본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들은 ‘소망 없는 다른 이’(4.13)들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절망 가운데 탄식하며 동물처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 아닐까(3.3-8).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잠시 그리했듯이 자칫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까지도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자들처럼 자고 취하는 것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소일할 수 있다는 옐로카드가 번쩍 들려진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깨어 근신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그때에 갑자기 그에게 멸망이”(5.3a, 새번역) 덮치듯이 그렇게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으로 종말을 맞을 수 있다. 이건 경고다. 또한 주의 재림 이전까지만 유효한 복음의 외침이다.
분명 다르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5.6). 이 세상이 온통 주의 재림과 상관없이 이생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해도 재림신앙을 따라 사는 자는 이 세상으로 끝이 아닌 주의 재림과 함께 펼쳐질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면서 오늘을 다르게 사는 것,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영적 자존감,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실존이다.
어머님은 생전에 [주님고대가]를 자주 부르시곤 하셨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약속한 주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1절) 저녁에 돌아오는 가족을 맞을 엄마의 마음, 첫 휴가 나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헤어져 지내다 이제 곧 만나게 되는 사람, 그런데 내가 주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이들만큼도 아니라면 ….
종말(주의 재림)이 곧 있으리라는 것 때문에 내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4.11)는 일에 게으르게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것도 꼴불견이고, 주의 재림(종말)이 있다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현실로 보이는 것들에 연연하며 안주하려는 것 역시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는 삶이다. 정말 귀하고 가치 있는 것들에는 진짜와 구별이 곤란한 가짜가 많은 법이다. 주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헛된 속임수들이 많은 이유도 그렇다. 이런 혼탁한 시류 앞에 종말을 살아가는 바른 신앙의 눈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님 맞을 준비에 좀 더 마음을 쓰고, 또 그 만남이 부끄럽지 않도록 나를 말씀스럽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겠다. 오늘만큼 주의 재림이 더 가까이 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