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직③ - 그 사역철학2(고후 4.7-18)

20200930(묵상)

   

 

 

사도직- 그 사역철학(2)

2 Cor. 4.7-18

  

   본문 관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12)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겨쌈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13-18)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잠시 받을 환란(보이는 것)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보이지 않는 것)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낙심하지 아니할 세 가지 이유 - 질그릇과 믿음

 

낙심하지 아니할 이유가 더 깊게 뿌리를 내린다.

바울은 보배이신 하나님과 질그릇인 우리(‘’)라는 비유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7). 율법의 영광처럼 없어질 것과는 다른 길이 있을 것’(3.11b)이라는 복음의 영원한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새언약의 일꾼’(3.6a)의 자리에서 곧바로 질그릇의 자리로 이동한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 신앙이다. 믿음’(13)이 보배를 위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 지불해야 할 잠시’(잠깐, 17-18)의 고난과 고통을 넉넉히 통과해 가게 만든다. ‘영원한 영광은 질그릇을 통해 성취된다. “사도는 질그릇이다.”는 고백이 내 심령을 흔들어댄다.

   

 

우리는 질그릇이다(7-12).

 

보배와 질그릇에 대한 비유에는 바울의 하나님알기’(Knowing)와 그에 따른 자신의 사역알기’(Doing)가 아름답게 살아 숨 쉬고 있다(7). 때문에 바울은 새언약의 일꾼’(3.6a)임에도 불구하고 고난행전(8-12)으로 얼룩진 자신의 생을 낙심하지 아니하며!”라는 후렴구에 담아 노래할 수 있었다(1,8,16). 여기에는 질그릇다움을 잃어버린 고린도교회의 유대주의자들(2.17, 3.1)을 향한 바울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 같아 더 안쓰럽다.

이렇듯 바울의 사역철학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알기’(Being)가 흔들림 없이 박혀있다. 종종 문제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았다(1-6)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변함없는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 때때로 나는 질그릇이다!”는 생각을 희미하게 만드는 경우다. 나를 통해 보배가 더 빛나더라도 질그릇이 보배일 수는 없고, 또 그렇게 되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에게는 이에 대한 분명한 사역철학이 있었다(7b).

질그릇임에도 보배를 가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은 죄인임에도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 즉 의인된 죄인으로 살아가는 자라는 영적(靈的) 주제파악이 된 사람에게서 가능한 신앙고백이자 삶의 모습이다. 인간은 질그릇에서 출발하여 보배가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자신의 질그릇다움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마치 보배라도 된 것처럼 언행(言行)하는 자들 때문이다.

질그릇(우리 몸)에 보배(예수의 생명)가 나타나는 것 때문에 만나는 고난이라면 그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질그릇다움의 핵심이다. 나를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와 목적이 있음이며, 그리하여 보배를 담은 그릇이기에 보배처럼 귀하게 여겨주시고, 지켜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나님, 새록새록 느껴지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다. 이것이 주님을 위해 죽는 자로 살아가는,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아는 자의 행복 아닐까(11-12).

 

 

우리에게는 든든한 믿음이 있다(13-18).

 

믿음은 낙심을 이기는 또 하나의 열쇠다(13). 이것은 질그릇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꿈꾸는 사역의 질과 깊이를 결정한다. 이 믿음을 따라 언행하며 사는 종점은 놀랍게도 부활의 아침이다: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14) ‘부활신앙이야말로 초대교회가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세상에 외친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복음 증거가 사역의 핵심이며, 이를 위해 더불어 매진하자는 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메시지인 셈이다.

한편 우리와 너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부활의 영광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넘치는 은혜를 받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15, 현대인의성경)까지를 더불어 이루어 내는 일이다. 바울은 비록 고린도교회가 여러모로 함량미달이지만 그럼에도 사역의 파트너로 낙심을 넘어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지금 고린도교회를 향한 신뢰의 ’(13b)을 믿음으로 하고 있으며, 더불어 그 믿음 앞으로 고린도교회가 아멘으로 나아오기를 소망한다.

얽매이기 쉬운 과거를 이처럼 훌훌 떨어버리기를 원하는 바울에게서 믿음의 세계 안에서 펼쳐질 미래의 그림이 조금씩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것은 더 이상 사람이 보는 ’(외모)이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 사람을 영의 눈으로 보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갖기에 대한 열망이자 낙심을 이기는 길이기도 하다(16, 삼상16.7). 겉푸름이라는 드러남에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속푸름이라는 영적인 것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해서 아는 자다.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다(18, 11.1).

이것이 보이는 오늘이 던지는 환난이라는 파도를 잠시잠깐으로 받게 하고, 동시에 경한 것’(가벼운 것)으로 상대하게 만든다(17a). 그리고 환난은 영광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도록 만든다.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크고 또 영원무궁한 영광이다(17b). 때문에 새언약의 일꾼(3:6a)으로서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환난 중에도 말이다. 믿음은 이처럼 환난에서 영광을 보는 눈이다(17-18).

 

 

부스러기 묵상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18b)

 

없어질 영광이냐, 아니면 영원한 영광이냐를 기억하라!(3.11)

어떤 사람’(3:1)들은 유한했던 율법의 영광을 다시 교회 안에 혼합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새언약의 일꾼’(3.6a)으로서 복음의 영원한 영광이 부활의 그날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사도로서의 사역에 헌신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밝힌다. 바울의 사역철학이 복되고 귀한 것은 우리도 너희와 함께”(14) 이 언약에 참여하게 되기를 그렇게도 소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너희’(2.5,17, 3:1)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울의 넓은 가슴이 새록새록 느껴진다. 바로 그 너희를 많은 눈물로 사랑하며 품고 가는 바울을 배우고 싶다(2.4). 우리(바울)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너희(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성도)는 더 이상 사랑으로 함께 갈 수 없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사역자), 이쯤 되면 이미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공멸(共滅)하는 공동체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바울은 사탄의 노림수를 이미 다 간파하고 있었다(2.11). 이것이 지도자의 영성이다.

씁쓸하지만 우리시대의 교회를 떠올려 본다. 없어야 할 고린도교회의 모습은 약방의 감초처럼 흔하고, 있어야 할 바울은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는 것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든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낙심하기 딱 좋은 영적 환경이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하”(1,8,16)겠다고 선포한다. 그렇다면 나와 바울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나는 바울다움과의 간격 앞에 힘없이 멈추어 서 있는가. 나를 말씀 앞에 고발한다.

고린도교회처럼 바울을 불신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탄의 장난감이 될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내 심령을 강하게 압박한다(2.11). 바울처럼 끝까지 고린도교회를 믿어주고(1), 품고(14), 사랑하고(2.4), 그리하여 마침내 저 영원한 부활의 아침을 함께 맞이하는 것, 이것이 사역자의 심장이어야 한다는 생각, 이 사역철학을 가지고 바울처럼 교회와 성도를 위해 목양(牧羊)하는 것, 바로 여기가 목회의 소명이 자리해야 할 땅이다.

어찌보면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낙심하는 것보다는 나의 못남과 추함을 보면서 낙심하게 되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처럼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더욱 더 분명하다. 동일한 영광의 직분을 받았으며(1-6),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고(7-12), 이 영원한 영광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믿음(13-18)을 주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처럼 겸손히, 또 겸손히 주님 앞에 자기 자신을 볼 수만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다움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을 보는 믿음의 눈을 구한다. 바울처럼 교회를 보는 질그릇이기를 하늘 향해 가슴 깊이 두드리는 시간이다.

 

 

[질그릇의 기도]

 

주님은 보배이십니다.

나를 질그릇이라 칭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것도 보배를 담은 그릇이니 이 얼마나 황송하고 복된지요.

주님과 나의 관계가 이처럼 명백해졌으니 감사드립니다.

해서, 질그릇으로 부르신 뜻을 감당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나를 보면 보잘 것 없고 초라합니다.

하지만 내 안에 계신 보배로운 주님 때문에 난 자주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보배 때문에 덤으로 귀하게 보여지는 것뿐인데,

나 역시 귀하고 그럴 듯 한 것처럼 보여지고 싶고,

그래서 나 역시 보배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버리곤 할 때가 많아져갑니다.

 

보배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는 질그릇임을 잊지 않도록 깨우치며 살아가는 바른 믿음을 주십시오.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질그릇의 자족을 배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 힘과 결심만으로는 언제나 실패였음을 아시나이다.

때문에 질그릇의 현장을 지켜주셔야만 비로소 가능케 됨을 인정합니다.

다시금 그 보배로운 십자가 앞에 무릎을 조아리나이다.

 

언제까지나 질그릇의 신비를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질그릇이 아닌 더 빛나는 그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며 살게 하옵소서.

질그릇이라는 조연으로 황송해 하며 살겠습니다.

주여! 보배라는 주연을 영광스럽게 하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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