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12)

20210911(묵상)

 

 

 

율법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Gal. 5.1-12

 

    본문 관찰

 

    율법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12)

       자유[복음] vs [율법](1-6)

       할례(유대주의)의 실상(7-12)

 

 

() 유대주의

 

그리스도인의 생활복음(복음행전)이 선포되는 순간이다.

새언약(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더 이상 옛언약(할례와 모세의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해방)의 복음에서 비롯된다: “저희(할례주의자)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2.4)

   

 

자유[복음] vs [율법](1-6)

 

할례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빛난다. “할례와 그리스도가 양립할 수 없다.”(2)는 것이 바울복음의 주요 핵심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이야기 하는 이유를 전개하는 바울의 신학적 논리다. 아마도 갈라디아교회는 믿음의 보이는 증거로서의 할례를 선호했던 것 같다. 믿는다는 것을 확실한 증표인 할례로 확증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할례주의자들의 아류로 전락해 버린 너희가 이해하는 할례에 대한 바울의 지적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는 것을 얻기 위해, 즉 할례를 의로움(믿음, 은혜)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4a)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익하게 한 것이고, 따라서 할례 받은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할례를 받았다는 율법 하나만을 지키는 것으로가 아닌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3b)로서 살아야 하는 것에 이미 동의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계속되는 변증이다. 할례는 이미 이를 다 수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할례는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음을(2),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4)가 되게 하였다. 이것이 율법(할례) 아래 있는 갈라디아교회가 당면한 문제다. 율법대로(律法大路)를 따라가면 만나게 될 실상은 이처럼 비극이다(1-4).

   

 

할례(유대주의)의 실상(7-12)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7b)

       ∙요동(혼란)하게 하는 자(10b)

       ∙어지럽게 하는 자(12)

 

할례(유대주의자)라는 율법을 구원에 더하려는 자들은 누구인가. 갈라디아교회로 하여금 은혜의 복음(진리)를 따르는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 율법주의자들이다. 이것은 저들을 부르신 이’(8)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적은 누룩이 반죽 모두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갈라디아교회 전체가 요동하게 하는 자’(어리럽게 하는 자; 10b,12)와 같은 누룩에 전염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처럼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은 누구든지 필연코 심판을 받을 것이다(10b).

여기에 대한 바울의 형언할 수 없는 메시지를 들어보자:“형제들이여, 나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내가 할례를 가르친다면, 어째서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가르쳤다면, 십자가를 전하는 어려움도 사라졌을 것입니다.”(11, 쉬운성경) 지금 이 서신을 쓰고 있는 때에도 유대인들에게 핍박과 죽음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다메섹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할례(율법)를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십자가의 진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복음이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다시할례를 받아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과 하나님의 의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악이다. 따라서 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한편 유대주의자들은 교묘하게 접근한다. 십자가의 은혜와 복음을 믿는 것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그것만으로 부족하니까 거기에 할례(율법)을 더하는 것을 요구한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과 바로 얼마 전까지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됨의 표(sign)로 알고 있지 않았는가.

때문에 다시 종의 멍에’(할례, 율법)를 취함으로써 요동하게’(어지럽게, 10b,12) 되는 죄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을 누구보다 바울은 깨닫고 있었다. 이미 갈라디아교회는 이 거짓 복음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중이다. 그만큼 유대주의는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복음은 이처럼 거짓에 노출되는 위험에 처해지곤 한다.

율법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할례 하나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만일 할례를 받는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3). 하지만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려다가 율법의 정죄를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복음과 은혜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자유와 거리가 멀다. 십자가만이 희망이고 길이고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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