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을 디자인(Design)한다(갈 4.12-20).

20210909(묵상)

 

 

 

바울을 디자인(Design)한다.

Gal. 4.12-20

 

    본문 관찰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a)

       ‘내가 처음’(13a)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15a)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

       ‘내가 이제라도’(20a)

   

 

바울의 자증(自證)

 

바울은 지금의 자리에서 지나온 이전 과거를 돌아본다.

왜 갑자기 자기 간증인가? 그 이유는 갈라디아교회를 위해 자신이 한 복음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과거’(13-14,15b-16, 13a_“내가 처음에”)를 회고하면서 지금을 돌아보도록 격려한다(15a_“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그리고 필요하다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19) 할 것을, 그리하여 다시 처음에를 신뢰할 수 있게 된다면 이제라도를 새롭게 각오함을 갈라디아교회 앞에 표한다(20).

   

 

변한 갈라디아교회

 

바울이 처음에갈라디아교회와의 만남을 가졌을 때 그들은 바울의 약함까지도 넉넉히 품었고, 더욱 하나님의 천사와 예수님처럼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을 영접하였다(13-14).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줄 준비가 된 헌신된 그런 너희였다(15). 이렇듯 처음에는 바울과 갈라디아교회의 관계가 해롭지 않았다(12b). 이것이 복음의 은혜와 능력 안에 있을 때의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15a) 갈라디아교회는 지금 변해 버렸다. 무엇이 이처럼 바울이 너희’(갈라디아교회)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어 버린 사이가 되게 했을까(16). 바로 그들’(17) 때문이다. 이렇듯 유대주의자(율법주의자, 할례주의자)들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복음으로 복음되지 못하게 하는 일의 전면에 서 있다.

하지만 바울이 진단(통찰)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열심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갈라디아교회)로 그들(유대교; 할례, 율법)을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17). 이렇게 해서 갈라디아교회는 어리석게도 그들의 꼬임에 그만 넘어가 버렸다. 순전한 복음과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변치 않은 바울

 

갈라디아교회의 바울을 향한 첫 사랑은 13-15절이었다. 바울의 병(육체의 약함)이 짐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였다(15).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달라진 게 없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참된 말’(16), 즉 복음의 진리를 말한다. 바울과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불변한데 갈라디아교회는 변했고, 급기야 이들의 관계가 원수가 되어버렸다(16).

바울과 갈라디아교회 사이에 진리(복음)와 십자가게 세워졌을 때는 불변하는 진리 안에서 서로가 평강이었다. 그런데 그들곧 거짓교사(다른 복음)들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기쁨은 사라지고 바울을 원수보듯 하게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길은 없는 것인가. 해답은 변치 않는 바울에게서 선포된다.

바로 19절이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바울은 갈라다아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까지다시 어머니처럼 해산하는 고통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렇듯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할 만큼 그들 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진리)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갈라디아교회의 추락의 끝은 어디인가.

어찌된 게 다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21)이 되어 버렸다.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율법의 신발을 신고 있으니, 이를 어찌할까. 하지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오직 불변하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이것을 자신 한 사람에게서 만족하거나 머물게 하려는 자가 아닌, 이 진리와 복음의 영광을 다시 갈라디아교회에 부흥하기를 원하는 바울이 있기에 희망은 있다.

그러므오 비록 지금은 어둡지만 이제 곧 다시 바울과 갈라다아교회가 예수 안에서 만났던 처음처럼 복음의 영광을 잉태하는 해산의 수고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아마도 바울에게 이 마음과 열정과 사랑과 희망이 없었다면 지금 이 편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의 모습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다. 복음의 능력과 영광이 해산의 수고처럼 새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알았기 때문이다.

거짓 교사들은 사심을 가지고 갈라디아교회를 병들게 했지만 바울은 사심 없이 해산의 수고로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러면 이 황무지에서도 장미꽃은 피어나게 되어있다. 율법은, 할례는, 유대교는 결코 생명이 아니다. 이것들은 결코 갈라디아교회를 살릴 수 없다. 처음부터, -하지만 비록 흔들리고는 있으나- 지금도 변함없이 여전히 복음의 빛과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는 바울이 있는 한 갈라디아교회는 희망이다. 이 복음의 생명이 갈라디아서 4장을 따라 흐르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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