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이냐 믿음이냐?(갈 3.1-14)

20210905-06(묵상)

 

 

 

율법이냐 믿음이냐?

Gal. 3.1-14

 

    본문 관찰

 

    갈라디아인들의 그리스도적 체험(1-5)

    오직 믿음(6-14)

    아브라함 예화(6-9)

    율법의 본래 기능(10-12)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결과(13-14)

   

 

증명들(1)

 

율법(律法) vs 믿음의 논쟁(토론)은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주제다.

바울은 성령을 받은 것’(2), 그러니까 이미 구원의 복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음 인가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신학(복음, 교회)적 입장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는 이제부터 시작할 복음의 우월성을 증명함에 있어, 초대교회 당시 양분되어 있는 구원의 복음의 두 기초(율법의 행위/할례 vs 이신칭의/은혜)에 대한 혼돈에 대해 몇 가지 증거들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증명해 내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먼저, 갈라디아교회의 체험을 들어서, 그리고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율법이냐 믿음이냐?”의 문제 앞에 선다.

   

 

갈라디아인들의 그리스도적 체험(1-5)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들은바 복음의 선포에 의한 믿음에 의해서다(2,5). 율법과 은혜(복음)의 가장 분명한 구분점은 성령을 받은 것인데 이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들음에서 온 것이라면 성도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3)도록 할 수는 없다. 성령은 갈라디아교회가 은혜 안에 있다는 최종적 보증이다.

이것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라며 율법주의(유대주의)자들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촉구하는 바울의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이는 할례와 율법이라는 옛 법의 무효선언이다.

한편 성령을 받았음에도 아직도 여전히 율법의 지배 안에서(아래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듣고 믿는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갈라디아교회는 믿음이 또 하나의 행위가 되었던 것 같고, 이를 꾀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 결국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이 둘이 다 필요한 것이다는 것이 할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음의 첨가(‘다른 복음 = 믿음 + 할례)였을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오직 믿음(6-14): ‘믿음으로!’

 

바울은 창세기 말씀에서 율법이 아닌 믿음의 우월성을 증명하기를 시작하면서(6) 곧바로 자신의 신학적 코멘트로 확증한다(7). 이 방식은 두 번 더 이어진다(8 vs 9, 10-13 vs 14). 이를 위해 아브라함을 들어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아마도 유대교는 아브라함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얼마나 그릇된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깨달아야만 했다. 이것이 지금 유대교의 옷에 찌든 아브라함에게 복음의 새 옷을 입힌 바울신학의 묘미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은 율법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에게 약속된 복()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 혈통(율법의 행위 = 할례)에 있다는 유대주의자(율법주의자, 할례주의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 복음’(복음)인가가 박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만일 유대주의자의 생각이 옳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가치하다. 혈통이 곧 구원이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갈라디아교회(‘’, 이방)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8).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믿음은 물론 아브라함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반() 복음이 죽어 무덤에 들어감으로써 이제 더 이상 유대주의라는 반() 복음이 설 자리가 없음을 선언한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급조된 신학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부터 선언되어졌음이 빛난다(8).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저주 아래 있는 자, 10)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7)과 대칭이 되는 표현인데, 이처럼 믿음으로’(7-9)가 아닌 것은 저주를 향해 가는 자임을 분명히 한다. 놀랍게도 우리(7)는 저희(10)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a, 21.23)

바울은 자신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편에 있었을 때는(다메섹 이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에 속하게 된 이후에는(다메섹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율법의 저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참으로 탁월한 복음의 변증이다. 진정 무엇이, 누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부스러기 묵상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

 

그리스도의 대속만이 아브라함의 복을 상속하게 한다.

이 둘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21). ,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복(칭의) 성령의 약속으로 이어지는 복은 율법으로부터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원이라는 은혜를 통해서다.

만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은 무의미하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라는 하나님의 섭리는 오류에 불과하고 만다. 하나님이 틀렸다’(실수하셨다)는 얘기가 된다는 말이다. 사실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을 붙들고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사 이래로 이어져온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전통)을 어느 날 갑자기 포기하고,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믿음의 구원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실체(제사)가 없는 허상(은혜)을 붙드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지불하는 어떤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셈이다.

그리스도가 구약의 약속대로 오셨고,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사 산 자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이를 보증하시는 성령이 오셔서 사도행전 신약 교회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구약의 율법(할례)으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그만큼 1세기 교회는 율법(행위구원)의 부흥을 다시 꿈꾸는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저주 아래 있는 자, 10)의 기세가 만만찮은 어두움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복음은 이 어둠을 뚫고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구원에 인간의 행위(할례)를 덧붙여야 한다면 인간 행위가 자신의 구원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얘기가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만으로의 구원을 사실상 폐기하게 만드는 불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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