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갈 2.11-21).

20210904(묵상)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

Gal. 2.11-21

 

    본문 관찰

 

    베드로 앞에서 옹호된 복음(11-14)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15-21)

       예루살렘 회의의 합의사항(15-16)

       반대의견(17-18)

          주 장(19-20)

          반 박(21)

 

 

이신칭의(以信稱義)

 

바울과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그만 얼굴을 붉힌 일이 일어났다(11).

무엇 때문에 그랬고, 또한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안디옥 사건을 왜 이처럼 기록해야만 했는지 궁금하다. 그만큼 초대교회는 율법(유대교)과의 관계 설정에 뚜렷하고도 선명한 입장을 따라 세워져가는 일에 속도 조절 중이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복음의 능력을 따라 교회를 세워가는 일이 생각만큼 어려운 주제였다는 뜻이다. 아마도 갈라디아교회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기 때문에 소위 안디옥 사건을, 그것도 베드로와의 갈등을 갈라디아서의 예화로 공개하는 것 아닐까.

   

 

베드로 앞에서 옹호된 복음(11-14)

 

바울이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꾸짖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일은 예루살렘 회의(1-10) 이후에 된 일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씁쓸하다. 그것은 베드로가 여전히 헬라 그리스도인(이방인)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유대인)이 오매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식사를 서둘러 끝내버린 모양이다(12). 할례주의자(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교회를 흔들고 있다.

이렇듯 복음과 율법은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전히 서로 충돌하고 있는 중이다. 사도들이 이러했다면 교회(안디옥, 갈라디아)들은 더 얼마나 혼돈 가운데 있었을까: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와의 만남에서 주의 계시(환상)를 이미 경험한 베드로로서는 언뜻 이해하기 곤란한 대목이다.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베드로를 책망함으로써 이제는 예루살렘과 바울이 역전되었음이 아니다. 그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14a) 보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은 자의 삶이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바나바)가 흘리는 것은 이 부분이다.

바울은 더 이상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유대 그리스도인)처럼 살아야 하는, 그러니까 율법과 복음에 양다리를 걸치고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것에 쐐기를 박는다. 문제는 이 일의 상대가 베드로였다는 것이 여러모로 충격이라면 충격이다. 그는 이미 고넬료와의 만남에서 이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극복하라는 메시지를 받았고, 주의 계시(환상)대로 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신 성령님을 경험했었다(10.1-48).

복음은 예루살렘 회의에서나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어야 할 살아있는 메시지다. 스스로도 자유하지 못한 복음이라면 이 어찌 복음을 복음대로 선포할 수 있으며, 복음의 장애물들을 물리치며 살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 문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로 시작되는 부분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논점을 미리 예시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15-21)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사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유대인들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복음이 마침내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전해지는 중이다. 바울은 먼저 복음의 핵심이자 예루살렘 회의의 합의사항(결정, 15-16)을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마팀내 더 이상 율법(할례)이 설 자리는 없다. 이 선명한 복음의 깃발이 갈리다아교회가 회복해야 할 복음이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하나의 반대의견(17-18)을 제시한다. 이것은 당시 유대주의자들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비난과 조롱의 돌이었을 것이다. 저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죄를 지으면 결국 죄 가운데 죽을 것이고, 더더욱 그리스도는 죄를 조장하는 자라는 논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것이 이런 구차한 변명처럼 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차원의 값싼 은혜인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b; 참고로, 이런 비슷한 논리가 로마서 61절 이하에 그대로 흐르고 있다.)

율법은 이미 허물어진 것이기에 다시 세울 수 없다(18). 아마도 베드로(바나바)는 이미 헐어 버린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처럼 행동했다(11-14). 이것은 자신 스스로를 범법자(율법의 지배를 받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은혜 안에 있으면서 율법의 지배(선언) 아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죽은 것(율법)이 산 자(은혜 안에 있는 자)에게 영향을 주게 한다면 더 큰 문제는 산 자 자신이다.

이렇게 해서 율법은 더 이상 복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바울의 일관된 주장이 이어진다(19-20). 율법의 기능과 역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이에 대해서는 4장 앞부분에서 다시 더 확장된 논리로 발전한다). 율법이 죽고 복음이 살았다면, 그렇다면 바울(‘’)의 삶 역시 복음의 지배권 안에 있음이 당연하다(19). 은혜의 나라에는 새로운 법이 유효하며(“살려 함이니라”), 따라서 율법은 죽었기에 더 이상 저촉 받을 필요가 없다(“죽었나니”).

   

 

부스러기 묵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복음의 정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복음의 찬가다(20)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은 바울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유대주의자들을 향한 바울의 반박이 통렬하기만 하다(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은 결단코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옛 지배권’(율법)은 죽어 끝났고, 그러므로 이제 새 지배권’(그리스도)을 따라 살아야 한다. 복음의 새 깃발이 갈라디아교회에 펄럭인다(20). 이것이 은혜의 지배권 안에 살아가는 자의 삶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답이다.

 

   
제목 날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살라!(갈 6.11-18) 2021.09.08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라!(갈 6.1-10) 2021.09.08
이제는 자유의 복음행전이다!(갈 5.13-26) 2021.09.06
율법의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12) 2021.09.06
누가 아브라함의 참 후손인가!(갈 4.21-31) 2021.09.06
바울을 디자인(Design)한다(갈 4.12-20). 2021.09.02
그때는 종이었으나 이제는 아들이다(갈 4.1-11). 2021.09.01
율법은 유한하다(갈 3.15-29). 2021.08.31
율법이냐 믿음이냐?(갈 3.1-14) 2021.08.31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다(갈 2.11-21). 2021.08.31
바울복음은 14년이나 한결같다(갈 2.1-10). 2021.08.31
복음은 계시에서 왔다(갈 1.11-24). 2021.08.31
복음은 하나다(갈 1.1-10). 2021.08.30
갈라디아서 맥잡기 2021.08.30